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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억여행

입력
2018.09.27 18:3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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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가볼까?” 장인의 말씀이 반가웠다. 명절에 부산 처가에 갈 때마다 부모님과 가벼운 나들이를 했다. 금정산성, 통도사, 간절곶, 산복도로, 해운대···. 그러나 십수 년이 훌쩍 넘어버리니 이제 갈 곳이 마땅찮아졌다. 올해는 어딜 가나 아내랑 이야기해 봤지만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이번엔 금정산성, 다음번엔 통도사, 도돌이표를 찍자 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장인께서 먼저 행선지를 이야기하시니, 고마울 뿐이다.

태종대! 많이 들어봤지만 난 처음이었다. 장인어른, 장모님은 이십 년 만에 왔다, 아니다, 삼십 년 만이다, 이런 말씀을 나누신다. 서울 사람이 남산에 잘 안 가는 것과 비슷한가보다. 추석 연휴라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지만, 다행히 산책로는 붐비지 않았다. 편안한 속도로 걸으면서 동백이며 사철나무, 후박나무, 배롱나무를 구경했다. 소나무도 많았다. 높은 절벽임이 느껴질 만큼 아득한 바다가 지척이었다.

슬슬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 태종대는 경치가 좋아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높았단다. 여객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면 섬이 더 절경으로 보인다고 말이다. 장인은 아홉 살이던 아내를 데리고 주전자섬이라는 조그만 무인도에 낚시를 갔는데 어린 딸이 바다에 빠질까 봐 걱정만 했고 정작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었단다. 그때는 바다도 넓고 섬도 커 보였는데 이제 보니 고작 조만큼 떨어진 섬이었고 저렇게 작은 섬이었냐며 허탈해하신다. 원래 기억 속의 공간을 실제로 보면 늘 턱없이 작지 않은가?

우리 부부가 1970년대에 결혼했더라면 신혼여행을 태종대로 왔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후쿠오카로 신혼여행을 갔다. 결혼 10주년이 되면 다시 오자고 했지만 미뤄져서 16주년을 맞은 올해 9월에 다녀왔다. 신혼여행 때를 떠올려보면 의외의 사건들이 있었다. 내가 아내의 하이힐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이다. 예뻐 보이고 싶어 하이힐을 신은 아내는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내 손에 이끌려 후쿠오카의 온갖 건축물을 찾아 헤매느라 발이 퉁퉁 부었고, 절뚝거리는 게 못마땅한 나는 무인양품에서 운동화를 사서 신겨주고 매장 앞에 있던 쓰레기통에 아내의 구두를 넣어버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과감한 행동이었다. 감히 아내의 구두를 버리다니. 범인은 현장을 찾아온다고 하듯이, 다시 후쿠오카로 간다면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은 무인양품 앞 쓰레기통이었다.

16년 만에 다시 찾은 후쿠오카는 변한 것도 있고 그때의 기억 그대로 있는 것도 있었다. 캐널시티야 쇼핑몰이니까 그대로 있을 테지만 ‘무인양품’은 없을지도 모른다. 4층 상점 앞에서 신발을 버렸던 휴지통은 있을까? 두근두근하면서 4층에 오르니, 그때와 똑같은 상호의 상점이 등장했다. 10년 이상 가는 식당도 가게도 드문 우리에게 그때 그대로 영업하는 많은 가게들은 색다른 기쁨이었다. 쓰레기통은 사라져서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나의 범죄도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기억의 공간은 나와 아내에게 다르게 남아 있었다. 술 한 잔 했던 호텔 라운지의 기억도, 문구점과 공원의 기억도 서로 달랐다. 게다가 기억 속의 공간은 늘 실제보다 크고 멋지다. 당시 탐방했던 유명 건축물을 다시 찾아갔더니 규모가 턱없이 작아 보이고 그때의 건물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번 여행은 16년 동안 왜곡된 기억을 바로잡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도 얹혔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은 절대 잊을 수 없다며 당당히 값을 치렀던 레스토랑,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서양식 건물들, 아파트 한 채를 싣고 다니는 듯한 거대한 크루즈배의 충격적인 스케일 등등.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우리의 먼먼 기억들을 다시 꺼낼 수 있도록 이 풍경들과 공간들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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