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북한이 빨리 핵을 포기하길 원치 않는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대강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18일 베이징 중국외교학원에서 만난 쑤하오(苏浩) 교수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핵으로 비수를 겨누는 북한이 적으로 존재한 덕분에 미국은 동북아에서 한국, 일본과 동맹을 유지하며 중국을 포위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물론 북한이 경제발전을 위해 결국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단서를 달긴 했다. 대북 압박의 실효성도 인정했다. 북한이 핵을 안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리 만무하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미국을 비핵화의 최대 불안요인으로 꼽는 대목에선 속이 영 불편했다. 쑤 교수는 미중 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비롯해 중국의 대외전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온 중견 학자다. 말 한마디의 묵직함이 남다르기에 허투루 듣고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교류프로그램 참석차 한 수 배우러 왔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느낌이었다.
마침 TV화면은 평양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의 환한 표정을 줄곧 비추고 있었다. 문 대통령은 비핵화의 물꼬를 트러 다시 미국으로 날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담판을 벌일 터였다. 잔치를 즐기듯 모두가 환호하는 이 순간을 중국은 불신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셈이다.
왜 이렇게 삐딱해진 걸까. 사실 어렵사리 조성된 한반도 대화국면은 중국에 신세를 졌다고도 볼 수 있다. 올해 본궤도에 오른 ‘쌍중단’(북한의 도발과 한미 연합훈련 동시 중단)과 ‘쌍궤병행’(비핵화 프로세스와 평화협정 동시 논의)은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한미가 훈련 중단을 반대하면서 한낱 시나리오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중국의 밑그림대로 남북한과 미국이 색을 입혀가며 작품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흐뭇하게 지켜볼 법도 하건만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양 뒤틀린 심보로 조바심을 내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중국의 독특한 비핵화 셈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베이징의 전문가들은 풍계리 핵 실험장 폭파,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해체, 핵 관련 시설 운용 중단을 언급하며 “북한이 세 걸음을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반면 미국을 향해서는 “북미회담을 열고 군사훈련을 중단해 고작 두 걸음만 나갔다”고 깎아 내렸다. 따라서 계속 앞으로 가려면 미국이 응당 행동에 나설 차례라는 것이다.
뜬금없는 숫자놀음이 선뜻 와 닿지 않았다. 지난 20여 년간 핵 위기의 악순환이 왜 되풀이됐는지, 비핵화의 첫 단계인 북한의 핵 리스트 제출이 왜 중요한지 정작 중요한 내용은 쏙 빠졌다. 대신 미국에 본 떼를 보여주겠다고 벼르는 고집만 남았다.
“북미관계가 한반도 문제의 본질이다. 중국, 미국, 북한이 3자 회담부터 열자.” 지난해 3월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베이징에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에게 던진 말이다. 미국과 온전히 맞붙기는 버겁지만 핵을 매개로 혈맹인 북한이 가세한다면 해볼만하다는 계산이었다. 자연히 종전선언의 당사자인 한국은 뒷전으로 밀렸다. 북한과 미국을 오가는 문재인 정부의 광폭 행보가 아니었다면 1년여가 지난 지금 비핵화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는 수모를 겪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중국의 시선은 항상 미국에 꽂혔다. 한민족의 생존이 걸린 핵 문제는 미국에 맞서기 위한 수단에 그쳤다. 반면 우리는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장님과 다를 바 없었다. 중국은 그대로 서 있는데 한중 관계가 널뛴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한때 티엔안먼(天安门) 망루 외교에 취해 신기루 속을 헤매다 사드 사태에 놀라 뒤늦게 허상을 떨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북한을 움직일 유일한 지렛대로 떠받들기도 했지만 ‘중국 때리기’가 확산될 정도로 우호적인 감정은 시들해졌다. 이제 판은 다시 깔렸다.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마주하면서 비핵화 결전에 나설 때다.
김광수 국제부 차장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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