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슈 드 파리(Monsieur de Paris)’는 프랑스의 사형집행인을 일컫는 말로, 공식 직함이라기보다는 조롱기가 엿보이는 속어다. 그 직책은 법무당국에 소속된 종신 공무원으로 대개는 세습됐지만 말기에는 계약직으로 운용되기도 했고, 아들이 없을 경우 친인척 중에서 선발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무슈 드 파리’는 프랑스혁명과 공포정치의 시대를 채워 활동한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 1739~1806). 그는 15세이던 1754년 집행인 대리가 돼 16세에 첫 처형을 집행한 이래 1795년 아들에게 직을 물려줄 때까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당통, 라부아지에,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등 약 2,700여 명의 목을 잘랐다. 그 끔찍한 ‘실적’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당대 기요틴(단두대)이 발명됐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대개 기피하는 일인 데다 집행인의 자녀는 공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다는 기록과 사회적으로도 천대 받았다는 기록이 더 그럴싸하다. 부업(혹은 본업)이 의사여서 평상시에는 병을 고치고 상처를 치유했을 샤를 상송은 국왕에게 여러 차례 탄원서를 쓸 만큼 열성적인 사형제 폐지론자였다고 한다. 그는 숙명처럼 물려받은 그 일의 굴레, 혹은 아이러니가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망나니’ 즉 사형 집행인은 사형수들 가운데 자원자를 받아 선발했다. 그들은 사형을 면하는 대신 무기수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고 한다.
마르셀 슈발리에(Marcel Chevalier, 1921.2.28~2008.10.8)는 프랑스의 마지막 ‘무슈 드 파리’였다. 그는 아들이 없던 전임 집행인 앙드레 오브레히트(Ander Obrecht)의 조카와 결혼한 인연으로 1958년 조수가 됐고, 이듬해부터 처형 보조 집행인으로 참여했다. 그가 리더로 기요틴을 작동한 것은 1977년 6월과 9월 단 두 차례였고, 각각 소녀 강간미수 살인범과 전 여자친구를 납치해 고문하고 살해한 자였다. 프랑스의 사형제 존폐 논의가 본격화하던 때였다. 1981년 10월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가 사형제를 폐지하면서 그도 은퇴했다. 법무부 계약직이던 그는 일이 있든 없든 3,650프랑의 월급과 6,000프랑의 처형수당을 받았고, 본업은 출판인쇄업자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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