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친소련 정치인 모하마드 나지불라(Mohammad Najibullah)가 1996년 9월 28일 탈레반에 의해 처형당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중앙아시아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입한 미국이 18년 만에 거둔 ‘결실’이었다. 하지만 냉전기 미국의 대외 군사ㆍ비군사 개입이 낳은 가장 강력한 후폭풍의 시작이기도 했다.
1960년대 입헌군주정 체제의 아프간은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념의 정치집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맑스-레닌주의 이념의 아프간인민민주당(PDPA), 마오쩌둥주의의 진보청년기구(PYO), 무슬림 형제단의 전통을 이은 종교정치그룹 ‘이슬람협회’ 등이었다. 리더들은 대부분 카불대 출신을 주축으로 한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노선상의 이견과 권력투쟁으로 각기 분화하며 실로 역동적인, 달리 말해 혼란스러운 시대를 관통해 갔다.
1970년대 들면서 군주정하의 누적된 정치 불만과 경제난, 71~72년의 식량 위기에 이은 대규모 소요 및 노동쟁의가 잇따르자 왕족인 다우드가 73년 무혈 혁명으로 집권, 공화국 출범을 선포했다. 그는 형제국 이란과 사우디 등의 원조에 의존하며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했고, 이슬람 협회 등의 잠재적 위협도 제거해 나갔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간을 침공했고, PDPA가 아프간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나 인도 유학을 다녀온 나지불라는 18세 무렵부터 PDPA에 입당해 활동했고, 75년 카불대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로도 정치에 몰두했다. 30세 되던 77년 PDPA 중앙위원이 됐고, 소련군 진주 이후인 81년 정치국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86년 당수가 됐고, 87년 9월 공화국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 무렵은 소련 붕괴 직전이었다. 소련은 미국-파키스탄과 88년 제네바 협정을 맺고, 이듬해 2월 군을 철수했다.
CIA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하에 활동하던 이슬람 반군 ‘무자헤딘’ 역시 다양한 이해와 이념으로 나뉜 연합 집단이었다. 그들은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급격히 분열했고, 80년대 후반부터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그 내분 덕에 소련군 철수 이후로도 약 3년을 버틴 나지불라 정권은 최종 승자인 탈레반에 의해 괴멸했고, 미국은 축배를 들며 아프간 친미정부 수립의 청사진을 구상했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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