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 1889.10.3~ 1938.5.4)는 나치 제3제국의 재무장과 반유대-국수주의를 고발하며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저널리스트다. 201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중국의 반체제 지식인 류샤오보처럼, 1935년 강제수용소 수감 중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듬해 폐렴과 합병증으로 병원으로 옮겨져 2년 만에 숨졌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0대 중반 무렵부터 기자 수련을 받은 그는 초기엔 ‘서프라제트’의 페미니즘 관련 기사서부터 연극 비평, 초기 자동차 관련 문제 등 다양한 분야의 기사를 썼고, 빌헬름2세의 독일제국 말기 평화주의자가 됐다고 한다. 그는 1913년 여성참정권 운동가였던 영국 맨체스터 출신 모드 리히필드우드(Maud Lichfield-Wood)와 결혼했다. 그가 유럽 평화와 반군국ㆍ국수주의, 휴머니즘 문제에 몰두한 건, 1차대전 참전 직후인 바이마르공화국(1919~33)과 나치 제3제국 시기였다.
폰 오시에츠키는 1927년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주간지 ‘디 벨트비네(Die Weltbühne)’의 편집장이 됐고, 2년 뒤 독일 공군이 러시아에서 전개한 비밀 군사훈련 특종 기사를 보도했다. 독일 재무장을 금지한 ‘베르사유 조약’의 명백한 위반이었다. 해당 기자는 해외로 피신했지만 그는 31년 반역 및 간첩죄 혐의로 18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말 특사로 풀려났다. 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나치의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 직후인 33년 2월 체포돼 슈판다우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그의 참담한 근황은 국제적십자사 등을 통해 유럽 사회에 알려졌고,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라는 대대적인 청원운동이 이어졌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로맹 롤랑 등도 동참했다는 그 운동의 슬로건은 ‘집중수용소로 평화상을!’이었다.
나치는 그의 수상을 저지하기 위해 공식ㆍ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수상이 확정되자 모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 자체를 금지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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