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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흑금성 평행이론

입력
2018.09.2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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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대북공작원이자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선 대북 비선으로 활약한 흑금성 박채서씨를 졸지에 ‘이중간첩’으로 만들어 구속시킨 도구는 국가보안법이었다. 사진은 박씨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 ‘공작’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대북공작원이자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선 대북 비선으로 활약한 흑금성 박채서씨를 졸지에 ‘이중간첩’으로 만들어 구속시킨 도구는 국가보안법이었다. 사진은 박씨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 ‘공작’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얼마 전 신문을 읽다 고개를 갸우뚱 했다. 8년 전의 이른바 ‘흑금성 사건’과 겹쳐져서다. 눈길을 잡은 기사는 ‘국정원, 북 동향 보고받고 대북사업 묵인… 보안법 구속 왜?’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이렇게 주요하게 보도된 국가보안법 사범은 처음이다.

구속된 이는 대북사업을 해온 김호(46)씨다. 2008년 북측에 얼굴인식 프로그램 개발을 의뢰했고 2016년부터 국내에도 들여와 팔았다. 북한의 지문ㆍ얼굴 인식, 금융 프로그램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건 해외의 대북 사업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다 임금은 싸니 하청을 맡기기 딱 좋은 밭이다. 김씨 역시 2007년 통일부의 접촉 승인을 받아 중국의 조선족 양모씨와 박모 김일성종합대 정보기술연구소장을 만나 개발을 의뢰하고 ‘거래’를 텄다. 그런데 갑자기 올해 8월 9일 경찰 보안수사대에 긴급 체포됐고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검찰 역시 그를 국보법상 자진지원ㆍ금품수수, 편의제공, 회합ㆍ통신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사실상 ‘간첩’이라고 본 것이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간부 출신으로 과거 구속 전력까지 있으니 ‘포장’하기도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일련의 보도와 변호인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김씨는 국가정보원의 정보원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북사업을 하면서 북한의 쌀값이나 시장 동향 같은 정보를 국정원 요원들에게 전한 이메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국정원 측으로부터 박 소장의 탈북을 유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국정원의 공작 파트에서 김씨의 사업을 묵인하거나 비호해주면서 그를 ‘비선 대북 정보원’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국에서도 그를 수사선 상에 올려둔 적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경찰 보수대가 돌연 그를 붙잡은 것이다. 심지어 경찰은 5년 전 그의 이메일을 압수수색해 ‘증거’를 확보해둔 상태였다.

김씨는 군사 기밀을 자진해 북측에 넘겼다는 혐의도 받고 있지만 이 역시 애매한 구석이 있다. 공소장에 적시된 ‘명백한 군사상 기밀’이란 김씨가 2013년 방위사업청의 해안복합감시체계 사업의 입찰에 참여하면서 사업설명회 때 받았다가 반납한 ‘제안 요청서’의 일부다. 확인 결과, 방사청은 검ㆍ경에게 이 내용이 군사 기밀인지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도, 의견을 전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흑금성 박채서씨도 그랬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대북공작원이었던 그를 국정원은 ‘이중간첩’으로 몰았다. 2010년 6월 그가 체포됐을 때 받았던 국보법 위반 혐의들은 대부분 5, 6년 전의 활동을 들춘 것이었다. 국가기밀을 북에 넘겼다는 혐의의 증거로 제시된 교범들도 기밀이 아니라는 건 군의 상식이다.

대공수사 행태를 잘 아는 인사들은 ‘김호씨 사건’을 경찰의 ‘오버’라고 추정했다. 보수대가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려고 묵혀둔 국보법 사건을 풀고 있다는 뜻이다. 국정원 개혁이 화두가 되면서 대공수사권을 통째로 경찰에 넘기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이런 사건이 지렛대가 될 수도 있겠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과거에는 ‘우리 정보원’이라고 언질을 주면 경찰이 손을 뗐지만, 지금은 안 먹히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애꿎은 시민 하나 잡게 생겼다”, “남북정상회담으로 훈풍이 부니 보수대가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라고 혀를 차는 인사도 있었다.

이 같은 ‘정치싸움’에 국보법이 훌륭한 도구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국보법이 존재하는 한 수없이 반복될 ‘평행이론’이다. “대통령이 하면 남북 평화와 번영이고 장삼이사가 하면 보안사범”이라는 말을 농으로 들을 일이 아니다. 1948년 11월 국보법이 국회에 상정되자, 조선일보는 사설 ‘국보법을 배격함’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해석과 적용이 모호해 경찰권의 발동이 무한히 강대해져 무수한 정치범, 사상범이 나오게 될 것이다.” 70년간 이 경고는 현실이 되어 왔다. 이제는 야만적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을 때다.

김지은 디지털콘텐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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