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보다 붉은 진홍색 꽃 잔치가 열렸다. 영광 불갑사는 이맘때 상사화 천지다. 일주문에서 절간에 이르는 길목과 산자락에 온통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마음 수양의 공간이 이리 황홀해도 된단 말인가. 종교적 성찰과 번뇌의 과정 모두 생략하고 극락으로 가는 길에 무임승차한 것 같아 얼떨떨하다.
‘그 누가 그대를 /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했던가(중략)…무릇, 사랑이란 / 가고 오고 / 떠나고 남고 / 만나고 헤어지고 / 돌아서고 돌아오는 것이어서 / 기다림이 더 아름다운 사랑이여 / 기다림으로 마을 설레이는 꽃이여, 꽃무릇이여.’ 절간에 들어서기 전 가장 먼저 만나는 것도 향토 시인 정형택의 ‘꽃무릇 예찬’이다. 들떴던 마음이 살짝 가라앉는다.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짝사랑의 가슴앓이에 곧잘 비유한다. 지금 만개한 꽃이 지고 나면 그때서야 잎이 돋아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이면 말라 죽는다. 흔히 상사화라 부르지만, 불갑사를 화사하게 장식한 꽃은 엄밀히 말해 석산(石蒜)이다. 꽃무릇이라고도 부른다. 상사화와 석산은 같은 수선화과로 꽃 모양이 비슷하지만, 상사화는 분홍색에 가깝고 8월 초ㆍ중순에 핀다. 반면 석산은 진홍색 꽃이 9월 한 달 절정을 이룬다. 잎이 진 자리에 말쑥하게 꽃줄기를 밀어 올려 6송이 꽃이 뭉쳐서 피어난다. 빨간 꽃잎은 바깥으로 말리고, 각 꽃송이마다 또 6개의 수술이 길쭉하게 나와 있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다. 불두화와 함께 주로 사찰에 심는 연유를 이런 의미에서 찾기도 한다.
상사화가 좋기로는 이곳 불갑사와 함께 인근 함평의 용천사, 고창 선운사가 꼽힌다. 관상용 외에 사찰에서 상사화를 심은 또 다른 이유는 절에서 유용한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늦가을 꽃이 진 뒤 채취한 비늘줄기에는 약 20%의 전분이 함유돼 있다. 줄기와 뿌리를 갈아 우려낸 전분은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사찰에서 유용한 구황작물이었다. 또 알뿌리에는 독성이 있어 방충제로 사용했고, 줄기는 약재로도 이용했다. 산림청의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석산의 비늘줄기는 다종의 알칼로이드를 함유하고 있어 거담ㆍ이뇨ㆍ해독 효능이 있다고 소개한다. 붉은 잎은 색을 내는 재료로 이용했다. 상사화 꽃잎 즙을 섞은 물감으로 탱화를 그리면 오래도록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갑사에서 언제부터 상사화를 심어 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사찰 뒤편 동백골 주변에 자생하던 것이 골짜기로 번져 연실봉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상사화로 뒤덮였다. 2001년부터 이 길에서 등반대회를 열었고, 이어 사찰 주변에 인위적으로 가꾼 것이 오늘날 축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주문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약 1km 구간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좌우 산자락과 공원이 온통 붉은 꽃 물결이다. 여러 갈래로 오솔길 산책로를 만들어 사진을 찍기 위해 굳이 화단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인도 간다라 지역 사원을 본뜬 탑원 주변에는 석산 외에 진노랑상사화, 붉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제주상사화, 백양꽃 등 여러 종류의 상사화로 화단을 꾸몄다. 다만 개화시기가 빠르기 때문에 대부분 절정을 지나 꽃잎이 시들었다.
녹색 숲과 대비되는 붉은 군락의 화려함에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인데, 여기에 축제의 흥을 돋우는 노랫가락과 인파까지 더하면 호젓한 꽃구경은 포기해야 한다. 대신 불갑사를 벗어나면 꽃 물결도 한결 차분해지고, 인파도 훨씬 줄어든다. 넘치는 것보다 모자람이 낫다는 것이 이런 경우다. 어둑한 나무 그늘 아래나 개울가 비탈에 발갛게 핀 꽃송이가 더욱 매혹적이고, 빼곡하게 무리 지어 선 것보다 한 두 송이 매끈하게 밀어 올린 꽃대가 한결 맵시 있다. 만개한 꽃송이가 가을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도 환상적이지만, 그늘에서 미쳐 피지 못한 봉오리가 뒤섞인 모습이 한결 자연스럽다. 사람도 소음도 적어 그제야 산사의 고요함에 젖어들 수 있다.
화려한 꽃 잔치에 가려진 불갑사의 전각도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불갑사(佛甲寺)는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사찰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불갑사는 법성포를 통해 불교를 전래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침류왕 원년(384년)에 백제 최초로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만세루 마당에 앉아 대웅전을 바라보면 지붕 한가운데를 장식한 작은 탑이 유난히 돋보이는데, 남방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일광당의 빛 바랜 기둥엔 품위가 묻어나고 대웅전의 꽃 창살도 들여다볼수록 그윽하다.
불갑사 상사화 축제는 오늘로 끝나지만 꽃이 핀 모습은 10월 초까지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산사의 조용한 가을 정취에 취하고 싶다면 지금부터가 더욱 좋다.
영광=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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