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은 ‘람보’로 시작해 ‘에이리언’으로 끝나는, 액션과 SF의 매우 희귀한 이종교배물이었다. 1987년 개봉 당시 관객들이 영화를 보기 전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총 쏘고 때려부수는 액션물인 줄 알았다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극장 문을 나서야만 했던 이유다.
특히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인간병기 마초들이 프레데터에게 차례로 무참하게 능지처참 도륙당하는 장면은 너무나 무섭고 섬뜩해, 이 영화의 장르를 두고 ‘알고 보면 호러다’ ‘그래도 액션이다’ ‘SF 맞다’ 등과 같은 쓸데 없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작의 이 같은 장르적 특징을 ‘더 프레데터’는 애당초 장점으로 취할 수 없었다. ‘에이리언’과 더불어 무자비한 외계 생명체의 쌍두마차로 이미 굳게 자리잡은 지금, ‘프레데터’를 다시 데려와 이종교배물로 반복해 포장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원작의 톤 앤 매너를 따라간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연출자를 비롯한 제작진이 ‘프레데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마초 캐릭터들의 부활을 염두에 둔 결과로 보인다. 앞서 고전 서부극과 전쟁물에서 자주 봐 왔던 거친 ‘싸나이’들의 감정적 연대와 희생이 원작 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재미를 보장할 수 있을 거라 믿은 듯 싶다.
아쉽게도 이 믿음은 믿음으로 끝난다. 일례로 하자 가득한 예비역들이 주인공 퀸의 사투에 왜 동참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도망갈 기회가 수 차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껄렁한 농담만 일삼고 구시렁대기만 하다가 차례로 죽는다.
프레데터에 맞서 각자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돕게 되고, 결국은 전우를 위해 자기 한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는 원작의 정글속 마초들과 비교할 때 개연성은 물론 비장미도 찾아볼 수 없다. 종반으로 가도 ‘쟤네들은 왜 저렇게 몰려다니기만 할까’란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위험에 처한 아들을 구하려 하는 주인공을 제외하곤 진화생물학자에서 여전사로 느닷없이 변신하는 케이시도, 퀸 무리와 죽자고 싸우다 갑자기 손을 잡는 정부 요원들도, 심지어는 프레데터마저도 행위에 당위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게 원작에 근접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패인이다.
원작 만큼의 박진감이 전혀 없어 날이 서 있지 않은 액션 장면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쯤 되면 시리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최근작 ‘프레데터스’가 오히려 잘 만든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오리지널의 익숙한 향수를 기대했던 40대 이상 관객들도, 클래식의 신선한 재해석을 희망했던 젊은 관객들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정쩡한 삼류 액션영화가 돼 버렸다.
조성준 기자 when914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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