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한다면, 정치는 권력적으로 배분한다. 시장이 실패하는 장소에 권력을 통해 자원을 투입함으로써 갈등과 파국을 관리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정치의 소임이다. 그러나 권력의 작동은 늘 새로운 갈등과 적대를 생산한다. 정치의 본질을 적대로 파악한 이는 독일의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다. 그의 개념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제도화된 정치와 구별되는, 정치 행동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다. “정치적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이는 도덕적인 것에서는 선과 악, 미학적인 것에서는 아름다움과 추함 등 다른 대립에서 보이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규준에 대응한다.”(‘정치적인 것의 개념’ㆍ살림). 적과 동지의 구별, 곧 적대를 정치의 본질로 보는 것은 꽤 호전적이다. 그러나 슈미트는 정치가 존재하는 한 적대는 회피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단언한다.
적대의 회피 불가능성을 정치에 대한 냉소나 탈정치화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적대는 인간사회의 존재론적 양식인 만큼, 이를 인정하되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질문에 부쳐야 한다. 벨기에 출신 정치 이론가 상탈 무페의 지적이다. “적대를 해소할 수 있다거나 합의 가능한 어떤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정치의 근본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며, 늘 나타나는 다양한 적대 현상 앞에서 당황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다.”(‘정치적인 것의 귀환’ㆍ후마니타스). 무페가 염두에 둔 새로운 적대는 난민 문제 등 극우 민족주의의 부활이지만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내부 갈등은 이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마련이다. 이에 ‘당황하거나 무력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치밀하게 준비된 정책이 필요하다. 정치가 갈등을 불가피하게 생산한다면, 정책은 문제 해결에 효과적이어야 한다. 새로 나타날 갈등의 양상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일시적이고 대증적인 처방에만 급급해서도 안 된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는 이런 정책이 없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말고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는데다 그마저도 효과가 어떠한지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중하위 계층 소득이 크게 줄어든 마당에 “최저임금은 효과를 내고 있다”(대통령)고 하니 어색하다.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한은 총재)는 식이니 무책임하다. 최저임금 문제는 불공정 지배 해소와 독점이윤 재분배를 위한 구조 개편의 시작점이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저임금 노동자와 소상공인을 적대케 한다. 그 갈등선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준비는 젬병이다. 늦게나마 내놓은 자영업자 대책도 일시적 지원에 머물 뿐 부당한 지배를 해소할 근본책에는 다가가지 못한다. 대우조선해양에 이어 성동조선해양에 대한 부당하도급 대금 소송에서 연달아 패소한 공정위를 보면, 불공정 지배구조를 해소할 정책역량이나 있는 지 의심스럽다. ‘최저임금 몇 푼 올려놓고는 집값은 몇 억씩 껑충’이라는 내 동료의 평은 정책 실패의 정곡을 찌르는 요약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저소득 노동자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일자리 창출에는 얼마나 기여하는지, 언제 효과가 나타날지에 대한 분석도 없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불신은 정부가 키웠다. 명확한 내용과 실체가 없으니 허깨비와 싸우는 공허한 논란만 부추긴다. 그럼에도 “내년 즈음이면 효과가 날 것”(정책실장)이라 하니 어리둥절하다. 근거도 없는 데다 무엇이 어떤 효과를 낸다는 말인지, 주어도 목적어도 모호한 비문(非文)이 점괘 수준이다. 성장론이란 이름을 단 것 중 출산주도성장이라는 파격적 코미디 덕분에 최악을 겨우 면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슈미트를 빌어 말하면 ‘정책적인 것’, 곧 두둑한 내용과 정연한 논리, 과학적 평가를 담은 정책과 그 역량이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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