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것이 나의 조형적 화두”
번쩍이는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말(馬) 세 마리가 전시장에 들어왔다. 나무뿌리를 연상시키는 듯한 이 다리로 말들은 위태롭게 서서 먼 곳을 응시하는 듯 고개를 높이 들었다.
동물과 사람을 소재로 인생을 성찰해온 조각가 정욱장(58)의 신작 ‘긴 여정-말’이다. 그는 “역동성을 상징하는 말의 다리가 식물의 뿌리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박제돼 있는 것을 표현했다”며 “이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재 우리의 역설적인 상황을 대변한다”고 설명했다. 말 아래에는 같은 소재의 커다란 알이 놓여 있다. 작가는 “포유류가 알을 낳는 상상에서 시작한 것으로 동물의 원시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원시성이 파괴된 말의 모습이 처연하다. 번쩍이는 알에 반사된 관객(사람)의 모습도 작가가 의도한 장치다.
스테인리스를 사용한 기이한 동물의 형상에서 인생을 돌이키게 하는 정욱장의 개인전 ‘긴 여정-마(馬)ㆍ인(人)ㆍ공(空)’이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미술관은 그의 작업세계를 높이 평가해 ‘2018 오늘의 작가’로 선정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2008년부터 천착해온 스테인리스로 만든 동물 신작과 함께, 납으로 만든 거대한 마두(馬頭)에 세 개의 구멍을 뚫은 ‘3개의 구멍을 가진 마두’, 철사를 이어 만든 ‘남자’, 돌에 구멍을 뚫은 ‘무제’ 등 과거에 선보였던 작품들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정욱장의 작품들은 한결 같이 속이 텅 비었다. 돌과 점토 등 무거운 물질을 이용해 만드는 조각의 특징을 거슬러 철사와 스테인리스 등 일부러 가벼운 소재를 택했다. 작가는 “계속 비워내는 것이 나의 조형적 화두”라며 “무거울 것이라는 조각이 가벼우면 사람들은 허탈해지는데, 이런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이 같은 허무주의는 그의 작가 행보와도 일치한다. 1989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작가는 ‘386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민중미술이 쇠퇴하고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후 경제호황과 해외유학자유화의 여파로 1990년대 들어서 미술계에서도 세계화 바람이 불었다. 급변하는 시기에 작가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2년 서울현대조각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신진작가로 한창 주목 받던 1994년, 돌연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작품을 해왔다. 2001년부터는 울산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허무주의는 가치를 비워내어 오히려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전시는 다음달 7일까지.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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