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체검안서ㆍ참고인 진술 엇갈려
국방부, 재수사 수용 뜻 밝혀
1981년 8월 16일 새벽 경기 시흥시 오이도 부근 해안초소에서 윤병선(당시 23) 소위가 총상을 입고 숨졌다. 고려대 경제학과 학군(ROTC) 19기로 소위로 임관한 지 50여일 만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수색한 중대장 이하 부대원들에게 발견됐고, 직접 목격자는 없었다.
당시 사건을 수사한 군사법경찰관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1시30분쯤 해안경계초소에서 근무하던 부사관 두 명이 소주 2병을 나눠 마시다 순찰 중인 윤 소위에게 적발됐다. 꾸지람을 듣고 근무지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은 A 부사관은 윤 소위 뒤를 따라가다 갑자기 M16소총에 실탄을 장전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B 부사관이 소총을 빼앗는 순간 한 발이 발사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이후 윤 소위는 부하로부터 협박 받은 자신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도 없었고, A B 부사관을 힐책하지도 않은 중대장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고민하다 새벽 4시35분경 (중간 생략) 자살함.’
군 복무를 마친 뒤 대기업 입사가 예정된 데다 기독교신앙을 가진 윤 소위가 자살할 리 없다고 유족은 반발했지만,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라 대놓고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20년 뒤인 2001년 국방부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사망 원인이 뒤바뀌진 않았다. 올 3월 윤 소위 동생은 형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며 국민권익위원회에 고충민원을 제기했다.
이에 권익위는 11일 사건이 명확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며 국방부에 재수사를 권고했다. 자살 여부를 판단한 보고서 기록과 사체검안서, 참고인 진술 등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총알 관통 방향이 수평(보고서), 위아래 사선 형태(사체검안서)로 달랐다. 보고서에는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적혀있지만, 2001년 재조사에선 “소대장실로 후송했을 때까지 살아있었다”는 당시 중대장과 전령(중대장 수행)의 진술이 나왔다. 권익위는 또 재조사 당시 윤 소위 평판을 보면 하극상을 질책하지 않는 중대장의 행위에 불만을 품고 자살했다는 결론이 납득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재수사 권고 수용의 뜻을 밝히고, 지난해 9월 설치된 국방부 차관 직속 군의문사조사ㆍ제도개선추진단에 재수사를 맡길 것으로 알려졌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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