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돈’ 문제라고 했다. 참여정부 시절 경제부총리를 지낸 김진표(71)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혁신성장을 위해 ‘금융 개혁’은 필수라며 “돈이 돌아야 성장이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을 향한 비판도 이어졌다. ‘돈줄’을 쥐고 있는 대기업이 혁신 분야 투자를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금융 개혁’으로 가계 중심 금융(융자)에서 기업 투자로의 대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중 은행들끼리 경쟁을 유도하고, 정치권에서 임명하는 ‘바지 사장’이 아닌 확실한 주인을 내세워 은행 전체가 책임 의식을 갖고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 의원을 만나 ‘혁신성장’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래는 일문일답.
-‘혁신성장’이란 주제로 우리 경제를 진단한다면.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였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갑자기 하향 성장 추세가 됐다. 대기업 중심의 불균형성장 전략 때문이다. 과거 대기업의 성장 전략은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ㆍ발빠른 추격자)’ 전략이었다. 선진국 성공 사례만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베끼니까 성공 확률도 당연히 100%였다. 거기에 저임금, 장시간 근로를 통해 우리나라는 제조업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정상 수준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더 이상 베낄 게 없다. 완전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할 상황이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ㆍ선도자)’ 입장에 놓인 것이다. 이는 ‘패스트 팔로워’ 시절과 달리 위험 부담이 크다. 예전엔 어떤 사업의 성공 확률이 90%였다면, 이제는 10%도 안 된다. 대기업 입장에선 90%짜리 사업만 하다가 10%짜리를 하려니 겁이 난다. 혁신투자를 못 한다. 자연스레 성장 전략의 키(Key)는 중소, 벤처기업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서유럽은 중소, 벤처기업이 주축이 된 혁신성장 전략이 성공했다. 우리나라는 못 했다. 이유가 뭘까. 혁신성장의 주체가 돼야 할 중소기업이 재벌 하청기업이 됐다. 보다 못한 정부가 대기업에게 혁신산업 분야에 투자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진출한 곳이 안전하고, 마진이 많이 남는 유통업이었다. 대기업에 의해 유통 산업 전체의 체인화가 이뤄졌다. 이런 식의 경제가 20년간 지속돼 왔다.
중소, 벤처기업은 거대 자본을 이길 수 없다. 우리 경제는 지난 20년간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혁신 투자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중소, 벤처기업이 하던 걸 재벌이 자꾸 침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양극화가 심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혁신성장’ 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시민들의 기원을 받아 설립된 정부다. 더구나 다른 진보 정권보다 정치적인 힘이 있다. 높은 지지를 기반으로 강력한 혁신성장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혁신성장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공부를 많이 했고, 정보기술(IT) 친화력도 높다. 평균 수준보다 높은 노동력을 지녔다. 각 분야의 ‘예비 창업군’이 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많다는 소리다.
문제는 금융이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금융은 대부분 기업 투자였다. 기업에 돈 빌려주는 게 활발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전체 금융의 60%가 가계 금융으로 넘어갔다. 은행들이 안전한 투자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쉽게 말해 ‘경쟁 없는’ 은행이 됐다. 은행이 안전만 추구하면, 돈이 필요한 기업 입장에선 죽을 맛이 된다. 투자에 따른 위험부담도 전부 기업이 져야 한다.
이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안전 투자를 최선으로 하는 금융업계에 ‘새로운 메기’를 집어넣어 경쟁을 유발해야 한다. 메기는 바로 인터넷 전문은행이다. 외환 위기 이후 기존 은행들은 융자 사업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가계 금융(융자)은 추가 이윤 창출에 한계가 있다. 반면 기업 투자는 위험 부담이 큰 만큼, 고수익을 노릴 수 있다. 수익률 경쟁을 벌이는 인터넷 전문은행이 적극적으로 기업 투자에 나서 이를 성공시키면 금융시장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선진국 은행에는 금융 전문가 그룹이 있다. 그 사람들이 주인이 돼 수익률 경쟁을 하며 운영하기 때문에 기존 환경에 안주할 수 없다. 금융은 공공이 주인인 사회주의와 비슷하게 흘러가선 안 된다. 현재 은산(銀産)분리에 따라 산업 자본은 금융 업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대신 정치권에서 은행장을 임명한다. 이런 흐름이 지속되다 보니 은행 내부에선 은행을 안전하게만 운영하려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그 결과, 금융은 제 역할을 못 하게 됐다.”
-혁신성장은 청년 일자리 창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소, 벤처기업 규모는 자본금 5억~10억 이내다. 공장에서 기계 사는 대신 아이디어 하나로 회사를 차리는 셈이다. 즉 중소, 벤처기업 투자의 90%는 사람에 대한 투자다. 예를 들어 30억원짜리 회사면 연봉 1억원짜리 30명을 고용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청년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혁신성장에 따른 중소, 벤처창업 열풍이 청년 실업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다. 열풍을 일으킬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금융 혁신이다. ‘융자(가계 금융)’에서 ‘투자(기업 투자)’로 금융 형태가 변해야 한다. 둘째는 기업 인수합병(M&A) 시장 활성화다. 한창 주가가 올랐을 때, 벤처기업들이 현금화할 수 있는 출구를 만들어줘야 한다.
앞서 말했듯, 벤처의 성공 확률은 10%도 안 된다. 실패가 당연하다. 그러나 실패로 모든 걸 잃게 해선 안 된다. 더 기회를 줘야 한다. 참고로 두 번째로 벤처 기업을 차렸을 때 성공 확률은 50%, 세 번째는 80%가 넘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자주 간다.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등을 연구하는 연구실에는 연구원보다 엔젤 투자자(기술력은 있으나 자금이 부족한 창업 초기 기업에 자금 지원, 경영 지도를 해주는 개인투자자) 숫자가 더 많다.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얘기하다가 사업이 되겠다 싶으면 바로 추진한다. 2008년 이후, 미국 금융은 기업에 대한 투자가 대세다. 기술을 주식으로 평가하는 식이다. 실패해도 자기 기술에 대한 대가만 못 받지, 빚을 질 일이 없다. 우리나라도 그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돈이 기술을 쫓아다니게 해야 한다.
-혁신성장을 논하며 ‘4차 산업혁명’을 빼놓을 수가 없다.
4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온다. 다양한 산업 분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의 경제를 살리는 핵심은 중소, 벤처기업이 될 것이다. 모든 분야의 혁신은 ‘중소, 벤처기업을 통해 돈을 벌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기존 산업 분야에선 점점 새로운 부의 창출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시대가 열리느냐, 안 열리느냐는 역시 ‘금융’에 달려 있다. 돈이 잘 돌아야 한다. 아마존, 인텔, 구글, 텐센트, 바이두 등 외국 대기업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 중소, 벤처기업 투자를 통해서다.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선진국들처럼 대기업이 중소, 벤처기업을 찾아 다니며 투자하는 기업형 벤처 캐피탈(CVC)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주 52시간 근무 제도, 최저임금 인상은 혁신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혁신성장의 핵심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경제의 거시적 틀을 바꾸려면 임금상승은 필수적이다. 물론 임금 상승에 따른 저항이 강할 수 있다. 지지율이 강한 집권 초기에 확 올리는 게 맞는 이유다. 근로시간 단축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흔들리지 말고 꾸준하게 가야 한다.
금융은 인체에 비유하면 피와 같다. 활발히 돌아야 한다. 특히 정부의 간섭과 개입이 적을수록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금융이다. 관치 금융을 오래하다 보니 경쟁이 없었다. 병이 들었다. 이 병을 고치려면 경쟁을 유발해야 한다. 돈을 쥐고 있는 대기업들이 중소, 벤처창업 분야에 투자하도록 만들고, 기업 투자와 가계 금융(융자)이 적절한 비례를 이루게 해야 한다.
-생산성플러스저널 창간호 축하 메시지 부탁 드린다.
생산성본부는 그 동안 우리 경제, 특히 산업 분야에서 생산성을 높이는데 많은 역할을 해 왔다. 산업 현장 곳곳에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분출되게 하고, 그런 아이디어들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생산성플러스저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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