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인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1861)과 로버트 브라우닝(1812~1899)이 1846년 9월 13일 런던 매릴번(Marylebone) 교회에서 결혼했다. 배릿가, 특히 아버지가 반대한 결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가족에게 결혼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고, 아버지는 맏딸 엘리자베스의 유산 상속 자격을 박탈했다.
둘은 1년 전 1845년 5월 처음 만났다. 무명 시인 로버트는 이미 유명했던 엘리자베스의 시들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지인의 주선으로 엘리자베스를 방문한 뒤부터 로버트는 6년 연상의 시인을 그의 시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의사들도 어쩌지 못하는 척추 질환을 앓아 아편과 모르핀으로 통증을 견뎠고, 거동조차 불편하던 때였다.
결혼 반대 이유는 석연치 않다. 배릿가는 자메이카에서 플랜테이션 사업을 크게 하던 부유한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무척 완고해 딸들의 연애와 결혼 자체를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로버트의 아버지는 은행원이었지만 생활이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고,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여서 오히려 로버트가가 배릿가를 탐탁치 않아 했을지 모른다.
8살 무렵 호머를 모방해 ‘마라톤 전투’라는 제목의 서사시를 썼다는 엘리자베스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의 맹렬 팬이었다. 당연히 페미니스트였고, 평화주의자였고,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아동 노동실태 등 당대의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는 시들을 쓰기도 했다. 그런 이념과 이상에서도 서로에게 끌렸을 둘은, 하지만 연애도 순탄치 않아 주로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아야 했다. 16개월 연애 기간 동안 나눈 편지만 책 두 권 분량에 달했고, 둘의 빼어난 연애시들도 대부분 그 무렵 쓰여졌다.
브라우닝 부부는 결혼식 직후 이탈리아에 신접 살림을 차렸다. 런던보다 남부 지중해의 기후가 엘리자베스의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지만, 런던 사교계의 이런저런 뒷담화를 피하고 싶은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후 건강을 얼마간 회복, 43세이던 49년 아들을 출산했다. 엘리자베스는 1861년 6월 로버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고, 로버트는 재혼하지 않고 38년을 더 살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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