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회의장인 하원의장은 ‘미스터 스피커(Mr. Speaker)’가 공식 명칭이다. 2007년 낸시 펠로시 의원이 미 역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이 됐을 때도 호칭만 바꿔 ‘마담(Madam) 스피커’로 불렸다. 스피커의 어원과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문희상 국회의장이 과거 ‘봉숭아 학당’에서 “의회를 대표해 목청껏 웅변하고 설득하라는 뜻”이라고 나름의 해석을 내놓은 적 있다. 국회가 행정부의 하수인이나 통법부로 전락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의장의 역할이고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 그런 문 의장이 “의장 임기 동안 청와대나 정부 말에 휘둘린다면 제 정치인생을 몽땅 걸겠다”며 울컥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정부 조롱과 야유로 일관한 국회연설 말미에 문 의장을 ‘청와대 스피커’라고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문 의장이 정기국회 개회사에서 4ㆍ27 판문점 선언 비준 동의를 촉구하며 평양 남북정상회담 때 여야 지도부 동행을 제안한 것이 꼬투리가 됐다. 김 원내대표는 문 대통령의 제안 사안을 문 의장이 재론하자 닥치고 물어뜯는 ‘외로운 늑대’의 습성을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 하지만 교섭단체 대표연설의 전통을 무시한 채 배설하듯 쏟아낸 그의 비판은 우선 번지수가 틀렸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국회도 남북국회회담 등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문 의장의 오래된 생각이다. 또 지난번 판문점 정상회담 만찬에 야당 지도부를 초청하지 않아 뒷말을 낳은 기억도 있다. 그런 만큼 “입법부 수장으로서의 품격과 균형감각을 상실한 코드 개회사”라는 비난은 ‘아무말 대잔치’에 다름아니다. 그런데도 한국당 의석에서 “잘했다”는 격려까지 나왔다니 한국당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는 이유를 알 법하다.
▦ 문 의장은 허접한 도발엔 따끔한 충고로 응수하겠다는 듯 “나는 정치인생을 통틀어서 국회가 국회다워야 한다고 주장해온 의회주의자”라며 “국회의장을 모욕하면 의장이 모욕당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가 모욕당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주기 바란다”고 꼬집었다. 2014년 7ㆍ30 재ㆍ보선에서 참패한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내 강경파를 혼내던 성질 같았으면 ‘개작두’ 발언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청와대가 11일 판문점 선언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하자 한국당은 반대 깃발을 높이 들고 있다. 그 사이에 낀 문 의장의 고민이 깊어간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l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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