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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인간의 땀과 피가 필요 없는 AI … 세상과 무관해진 대중은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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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인간의 땀과 피가 필요 없는 AI … 세상과 무관해진 대중은 어디로 갈까

입력
2018.09.07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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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이어

하라리의 인류 3부작 완결편

환멸ㆍ전쟁 등 21가지 테마로 나눠

파국의 기로 선 21세기에 경고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에 이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내놓음으로써 인류 3부작을 완성한 유발 하라리. 그는 신기술 발달로 이 세상과 무관해진 대중이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되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에 이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내놓음으로써 인류 3부작을 완성한 유발 하라리. 그는 신기술 발달로 이 세상과 무관해진 대중이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되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비뚤어졌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이후 유발 하라리의 인류 3부작을 마무리 짓는 이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집어 들었을 때 가장 큰 관심사는 ‘그가 어떻게 우아하게 퇴각할 것이냐’였다.

하라리의 서술 전략은 의도 여부를 떠나, 가장 쫄깃한 지식인 놀음인 ‘닥터 둠(Dr. Doom)’ 전략이다. 신문 칼럼 같은 곳에 흔히 등장하는, 지금 이 시대야말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으며, 이제 곧 이 나라가 파국으로 치달아 가고 있다는 엄청난 경고음을 울려대는 이야기 말이다. 말하자면 ‘광야의 지식인 모델’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어줄 것이요, 자신의 몸값도 덩달아 올라간다. 실제 파국이 오면 ‘거 봐라~!’ 할 수 있고, 파국이 오지 않는다면 ‘내 말에 귀 기울여 준 이들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삐딱하니 비관적 태도는, 뭔가 순진하지 않은 프로페셔널한 느낌까지 덤으로 안겨주니 한마디로 ‘꽃놀이패’다.

하라리 책의 포인트도 여기에 있다. 그는 어쩌다 지구의 지배자가 된 ‘사피엔스’가 빅데이터, 알고리즘, 인공지능(AI) 삼위일체를 통해 ‘호모 데우스’가 될 것이며, 그 찬란한 정점의 순간 스스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스케일의 시나리오를 써냈다. 최악의 상황을 거듭 강조하는 이분법적 대구와 대조를 효율적으로 구사하는 탁월한 문장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이 이를 뒷받침했다.

문제는 이런 ‘닥터 둠’ 전략이 멋져 보이고 눈길을 끄는 건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낼 때까지라는 점이다. 대안을 얘기하는 순간부터 스텝이 꼬이고 폼은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가능성을 이야기하려면 원래 자신이 제시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게 실은 최악의 가정에다 다시 최악의 가정을 여러 번 더한 것이라 얘기해야 하는데, 그러면 자신이 그려 낸 최악의 시나리오를 허물어야 한다. 그렇게 안 하려면 ‘시간이 얼마 없다,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식의 하나 마나 한 얘기밖에 할 게 없다.

그래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란 제목은, ‘닥터 둠’ 전략이 지닌 이 치명적인 약점을 피하지 않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3가지 법칙, 7가지 포인트, 10가지 관전법도 아니요 무려 ‘21세기’에 라임을 맞춰 ‘21가지’씩이나 교훈(‘제언’이라 번역했으나 원문은 ‘Lessons’)을 일러준다니 말이다. 이 말인즉슨, 대충 듣기 좋은 말 몇 가지로 두루뭉실하게 퉁 치고 마는 게 아니라, 여러 쟁점에 대해 되도록이면 다 발언하겠다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미안하지만 크게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 교훈을 설파해야 할 입장이 되니 하라리도 미래기술의 파괴적 가능성에 대해 종말론적 서술을 선보인 ‘호모 사피엔스’보다 ‘최악’의 수위를 낮춰야 한다. 그러다 보니 책에 쓰인 문장들 대부분이 ‘이럴 수도 있다’, ‘저럴 수도 있다’, ‘할 가능성도 있다’, ‘할 리가 없다’ ‘할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그런 서술 뒤엔 역시나 ‘물론, 이럴 수도 있다’는 구절까지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다. 힘차게 이야기를 밀고 가는 방식이 아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지음ㆍ전병근 옮김

김영사 발행ㆍ560쪽ㆍ2만2,000원

중세전쟁사가로서 하라리가 거듭 말하는 핵심은 딱 하나, ‘현대는 총력전 체제’다. “산업경제는 평민 노동자 대중에게 의존했고, 산업화된 군대 역시 평민 병사 대중에게 의존했다. 민주주의와 독재정부 모두가 대중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대거 투자했다. 생산 라인을 가동할 건강한 수백만 노동자들과 참호에서 싸울 충성스러운 수백만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중세와 달리 근ㆍ현대 들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고상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나간 건 인류가 어느 순간 참회와 각성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대중의 ‘땀’과 ‘피’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AI 같은 신기술의 출현은 ‘땀값’과 ‘핏값’이 제로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책에서 하라리가 제시하는 가장 핵심 키워드는 ‘Irrelevance’, 곧 ‘무관함’이다. 대중의 땀과 피가 더 이상 필요 없다면, 이 세상과 무관한 존재가 되어 버릴 대중은 대체 어디로 내몰리며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좀 거창한 동작으로, 좀 무서운 표정으로 말이다.

‘환멸’ ‘일’ ‘자유’ ‘평등’에서 시작해 ‘테러리즘’ ‘전쟁’ ‘겸손’ ‘신’을 거쳐 ‘교육’ ‘의미’ ‘명상’에 도달하는 21가지 교훈을, 마치 하나의 실에 이어 놓은 듯 매끄럽게 이끌어 나가는 서술방식은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9장 ‘이민’, 12장 ‘겸손’, 14장 ‘세속주의’, 17장 ‘탈진실’ 같은 장들은 하라리가 지닌 장점을 확연하게 보여 준다. 유대인에 대한 과도한 신화화를, 유대인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12장 ‘겸손’은 그 중에서도 꼭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역시 자신과 관련된 얘기를 해야 가장 힘 있는 글이 나온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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