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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한일 격차 600년, (3) 더디고 약한 개혁

입력
2018.09.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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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세종대에 확인된 양국 격차의 생성·확대 배경의 하나로 더디고 약한 개혁을 살펴본다. 한때 기세가 좋던 왕조가 지배층의 부패 등으로 다른 왕조나 체제로 대체되는 것은 동서고금의 다반사다. 500년을 버틴 조선이 적기에 새 체제로 탈바꿈하지 못하고 토붕와해되어 교린 관계의 일본에 병합된 실격의 역사는 큰 자괴감을 안겨준다.

“조정이 나라를 세운 지 거의 200년이 되었으니...중엽의 쇠퇴기라고 할 수 있으며, 권간들이 나라를 혼탁하게 하고... 재앙도 많았는데 오늘에 이르러선 마치 노인이 원기 쇠진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는 데 이른 것 같이...”

“예로부터...임금으로서 수성을 잘한 두 유형이 있는데...난세를 계승하면 그 폐단을 개혁하여 치세를 이룩하는 것이니...진서산(眞西山)은...변통해야 할 때 변통하는 것이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가는 길이다...”

이이가 1581년 10월 16일과 이듬해 9월 1일 올린 소의 일부다. 임진전쟁 발발 10여 년 전 쯤 평화롭던 시절의 국세에 대한 평가다. 그런데 그가 이웃 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면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건국 후 200년이 채 안되어 한일 격차가 더 커지고 쇠진한 노인처럼 되어…연유를 살펴보니 동방의 성주 치세기 등으로 알아온 태종ㆍ세종대에 강화된 서얼차대제와 노비제의 부정적 영향이 먼저이고, 권간들의 안일한 자세로 통신사 박서생의 앞선 일본 따라잡기 제안이 거부된 것이 다음입니다...난세를 계승하여 수성하려면 제때 변통해야 한다는 송나라 진서산의 지적대로 서둘러 두 차별적 신분제를 폐하고 이웃 나라 따라잡기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이조차도 신분제 폐해의 심각성을 백성의 눈높이에서 직시하지 못한다. 그 결과 차별 타파 조치는 300년 뒤인 정조~고종대 100여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추진된다. 이것이 조선 시대 최대 개혁의 하나로 평가되는 것은, 태종ㆍ세종대의 개악 입법이 장기간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한일 격차를 키운 큰 요인이었다는 사실의 반증일 수 있다.

이 밖에 중종대 조광조의 정치개혁(1518년), 광해군~숙종 대 김신국, 김육, 허적 등의 대동법(1608-1708년), 영조대 조현명, 홍계희 등의 균역법(1751년)과 말기의 갑오개혁 등이 있다. 그런데 갑오년 이전 개혁들은 근본적인 해법으로선 약점이 많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점이 드러난다. 혁신적인 내용이 많은 갑오개혁은 청일전쟁 승리로 기세를 올린 일본의 압력과 지도로 이뤄지고 개혁 시점이 국세가 크게 기운 시기여서 그 의의가 퇴색된다.

일본은 세종의 통신사가 찾아왔을 때 조선보다 앞선 면이 많았지만 이후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면서 통신사는 세종대 3회로 중지되고 국가간 교류도 끊긴다. 100년 후 일본의 정국이 안정을 찾으면서 양국 격차가 확대된 배경에는 16세기 중반부터 물밀듯이 들어온 서양인과 서양문물로 일본인의 지식과 정보가 일신된 사실이 있다. 하지만 이 무렵 조선내 지배층 인사 중에 동남쪽 이웃의 사정을 잘 알고 있거나 알려고 노력한 이는 없었다.

무로마치 막부 멸망 후 쇼쿠호(織豊)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혁, 260여 년 존속한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개혁이 이어진다. 전자에선 태합검지, 대명간 무력 분쟁·무허가 결혼 금지, 도수령(1588년)을 통한 병농분리 등의 조치로 공평과세와 세수입 증대, 평화 구축, 무사와 백성간 신분 구분이 시도된다. 후자의 여섯 차례 개혁에선 ‘얼굴이 보이는 개혁가’에 의한 강한 정책 드라이브로 자국 역사의 품격 제고로 이어질 수 있는 성과를 거둔다. 개혁가에는 장군인 5대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 고위 관료인 아라이 하쿠세키, 다누마 오키쓰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이이 나오스케, 가쓰 가이슈 등이 있다. 또 말단 관원의 신분이 무사여서 대민 행정상의 난맥과 부조리가 조선보다 적었다.

정리하면 양국의 근세기 개혁은 양인의 세부담 공평성 확보, 재정기반 강화, 시장과 상공업 의 활성화 등 경제 부문에 집중된다. 중앙집권체제하에 군역 부담이 큰 조선에선 대동법, 균역법 시행에서 보듯 텃새인 중하급 관원과 철새인 수령, 감사 등 지방관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생기는 징세 부조리로 개혁 효과가 약화된다. 재정기반 강화는 지배층의 편협한 세계관으로 차별적 신분제 개혁과 경제 활성화가 끝내 숙제로 남는다. 조선보다 빠르고 강한 개혁에 나선 일본에선 목표가 상충하는 부작용이 없지 않지만 중농주의에서 중상주의로의 전환, 조닌층 육성 등 시대순응적인 조치가 선보인다. 번의 재정기반이 약화되지 않은 것은, 분권체제에서 막부 지원없이 살림을 꾸려야 하는 텃새 번주와 가신들이 징세와 재정지출을 엄격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뒤늦게 지방분권제를 도입하여 정착중인 우리 지방정부의 징세행정과 재정운용이 이전보다 투명하고 책임있게 관리되는 현실에서 양국의 과거 상황을 비교 짐작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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