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이슬람구국전선 무장투쟁
10년간 민간인 15만~20만명 사망
국민 등 돌리며 ‘원리주의’ 쇠락의 길
#수십년 테러와 전쟁 ‘안전국가’로
억압적 통치 탓 일시적 안정 평가 속
평화 원하는 국민의 선택에 더 무게
오랜 기간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알제리는 1830년부터 프랑스 침략을 받다가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식민통치를 강화하자 알제리인들은 1954년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 1962년까지 8년간 ‘알제리 독립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한 끝에 1962년 3월 결국 독립을 얻었다.
독립 초기 정정은 불안했다. 벤 벨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나 1965년 6월 후에리 부메디엔 육군 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각했다. 부메디엔은 사회주의 및 비동맹 노선을 지향하며 탈(脫) 프랑스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FLN을 통한 일당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하지만 일당독재와 악화된 경제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강력했고 결국 1989년 헌법 개정을 통해 복수정당제를 채택한다.
이러한 정치변동 속에서 1988년 9월 대학교수 출신인 압바시 마다니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의 지도자 35명을 규합한 뒤 이슬람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이슬람구국전선(FIS)이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90년 6월 지방선거에서 신생정당 FIS는 압도적 지지 속에 지방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된다. 1991년 12월 총선거와 지방선거에서도 FIS가 승리하면서 알제리는 이슬람 국가로 바뀌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영향력이 상실되는 것을 우려한 군부는 1992년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FIS를 불법화하는 친 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FIS는 혁명이 아니라 합법적 정치활동을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장했던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달리 종교지도자가 아닌 일반 무슬림 대중이 중심이 되어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FIS의 정치활동과 무혈혁명을 통한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군부의 친 정부 쿠데타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이에 FIS는 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알제리는 약 10년간 민간인 15만~20만명이 사망하는 내전에 빠져들었다.
이후 상황을 돌아보면 FIS 내부 갈등과 민간인을 향한 테러는 국민들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FIS는 ‘무장이슬람운동(MIA)’,‘이슬람구국군(AIS)’, ‘이슬람국가운동(MEI)’,‘이슬람무장그룹(GIA)’ 등으로 분열됐다. FIS의 분열은 이들이 1997년 정부와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계기가 됐다. GIA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반발하여 1998년에는 ‘포교와 성전을 위한 조직(GSPC)’이 결성됐다. GSPC는 2003년 알카에다 지지를 선언하고, 2007년에는 알카에다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뒤 아예 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AQIM)로 개칭하여 알카에다 북부 아프리카의 지부로 활동하고 있다.
알제리 내전 종식에는 1999년 선거에서 군부와 FLN의 지지를 받아 70%의 득표율로 당선된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역할도 컸다. 그는 국가 안보와 안정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1999년 10월 이슬람 반군 모두에 특별 사면령을 발표하였다. 이후 반군의 활동은 세력이 꺾이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처지가 됐다. 다만 일부 이슬람 반군은 알제리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마그레브와 사헬지역으로 흩어져 테러활동을 벌이고 있다.
내전 기간 군부와 반정부 조직 간 무력충돌이 심화되면서 양측은 무고한 민간인을 공격하며 살해했는데 두 세력의 투쟁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또는 서구화와 이슬람화 사이의 투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급진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내국인들은 물론이고 알제리 거주 외국인, 심지어는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의 외국인들까지 암살 및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GIA가 소속 테러범들이 1994년 12월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프랑스 외교관을 포함한 3명의 무고한 승객을 사살한 사건은 알제리 내전의 심각함과 위험을 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FIS의 활동은 국내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잃으면서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안정과 평화를 향해 노선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전 당시 알제리 정부군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 역시 심각한 것이었으며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알제리는 내전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테러리스트에 대해 강력한 대처를 하면서 주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안전한 국가로 자리잡고 있다. 알제리 국방부는 2018년 상반기에만 117명의 테러리스트를 무력화했고 이 중 23명을 사살했다. 알제리는 또한 이웃 국가인 말리 내전에서도 적극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알제리와 말리가 긴밀한 관계였던 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테러 집단의 활동이 지역의 안정과 알제리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는 말리의 투아레그족처럼 알제리의 소수자 민족집단이 자치나 독립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 이후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인해 알제리인의 정체성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하고 아랍·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아랍어 정책으로 인해 토착어인 베르베르어는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했고 특히 교육에서 배척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언어·문화적 정체성이 강한 베르베르인은 알제리 정부의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마그레브 지역에서 ‘베르베르’라는 용어는 억압과 동시에 자유의 표상이다. 알제리 카빌리 베르베르인은 역사적으로 로마, 아랍,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언어·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며 반식민지ㆍ반정부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정부의 아랍·이슬람화 정책에 저항하여 1980년 ‘베르베르 봄’을 일으켰다. 베르베르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저항가수 마투브 루네스가 1998년 암살당하자 정부에 대한 저항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마투브의 암살이 알제리 사회 전체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고, 그의 암살은 이후 알제리에서 베르베르 관련 정책의 대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결국 알제리 정부는 2016년 베르베르어를 아랍어와 더불어 알제리의 공식어로 지정했고, 2018년에는 베르베르인들의 정체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년’, 또는 ‘새해’를 의미하는 ‘옌나예르(yennayer)’를 다른 국경일과 마찬가지로 공식 축제일로 공포하였다. 이는 알제리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알제리는 북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독재국가로 억압적인 통치로 일시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알제리 내전과 같은 상황을 피하고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국민들의 선택이 중요한 요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런 알제리의 행보는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김광수ㆍ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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