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기의 산업 성장을 흔히 2차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증기기관과 면방직을 중심으로 한 1차 혁명과 달리 2차 혁명은 전기 기계 철강 등을 주축으로 산업의 부피와 저변이 비약적으로 커졌고, 노동 수요도 그만큼 늘어났다. 속도와 규모가 1차와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중요해졌다. 그 변화의 상징적 원인이자 결과로 꼽히는 게 ‘재봉틀’의 등장이다. 재봉틀의 발명은 당연히 기계 기술의 발전 덕(결과)이지만, 1차 혁명의 성과인 실과 옷감으로 충분히 옷을 지어 공급해야 한다는 필요, 즉 손바느질의 한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방직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미국의 기계공 엘리아스 하우(Elias Howe, 1819~1867)가 근대적 형태의 재봉틀로 1846년 9월 10일 특허를 획득했다. 재봉틀 수요는 18세기 중ㆍ후반부터 끊임없이 제기됐고, 영국과 프랑스 등 1차 혁명의 근거지에서 몇몇 이들이 시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 실용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우의 재봉틀은 천을 사이에 두고 아래의 실을 위의 실이 잇달아 꿰어 엮는 로크 스티치(lock stitch)방식을 채택해 기능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그걸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한 게 바늘 위쪽이 아닌 아래쪽(뾰족한 끄트머리)에 귀(실을 꿰는 구멍)를 내는 거였다. 그 난제를 풀기 위해 고심하던 그가 어느 날 꿈 속에서 한 원시부족에게 붙잡혀 처형될 처지에 놓였는데, 사형 집행자의 창 끝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그의 가족사에 소개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상용화의 주역은 그가 아닌 아이작 싱어였다. 투자자를 못 구해 제품 생산을 못하던 하우가 형의 도움으로 영국의 한 속옷 공장에 첫 재봉틀을 250파운드에 판 뒤 영국에 건너갔다가 망해서 돌아와보니 싱어가 자기 특허를 도용해 만든 재봉틀로 큰 돈을 벌고 있더라는 이야기. 소송(1849~54)을 걸어 승소하면서 배상금과 안정적 로열티를 받게 됐지만, 어쨌건 재봉틀은 싱어의 작품이라고 아는 이들이 많다.
지퍼(zipper)의 발명자는 시카고 출신의 엔지니어 휘트니 저드슨이라 알려져 있지만, 그가 특허(1890)를 받기 40년 전인 1851년 다른 방식의 특허를 처음 낸 이도 하우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재봉틀로 이미 부자가 된 뒤여서 지퍼를 실용화하기 위한 연구를 이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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