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홍해와 카리브해를 주름잡은 잉글랜드 출신 해적 헨리 에이버리(Henry Avery, 1659~?)가 1695년 9월 7일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의 보물선을 약탈했다. 해적사(海賊史)에서 단일 사건으론 최대 약탈로 기억되는 사건이었다. 에이버리(혹은 에브리 Every)와 그의 해적들은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몫을 분배받은 뒤 뿔뿔이 흩어져 ‘은퇴’했고, 에이버리 역시 숱한 풍문을 남긴 채 종적을 감췄다. 그런 정황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다양한 서사물들에서 쉽게 낭만화하고 있지만, 그들 일당은 보물선과 호위선에 승선한 이들을 모두 강간ㆍ살해했다. 사건 직후 무굴제국은 영국과의 교역을 중단했고, 동인도회사는 에이버리의 목에 당시로선 거금인 1,000파운드의 현상금을 걸었다.
잉글랜드 플리머스 인근의 뉴턴페러스(Newton Ferrers)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에이버리는 영국 해군에서 잠깐 복무한 뒤 무허가 노예선 선원으로 잔뼈가 굵었다고 한다. 카리브해 마르티니크(Martinique) 해역의 밀수꾼 단속 권한을 부여받은 무장선 ‘샤를 2호’의 1등항해사였던 1694년, 그는 급여가 제때 지급되지 않는 것을 구실로 선상 반란을 주도해 배를 가로챈 뒤 해적질을 시작했다. 배를 ‘팬시(Fancy)’라는 이름으로 고친 그는 남아프리카 희망봉에서부터 아라비아의 홍해까지 누비며 악명을 떨쳤고, 무굴 보물선 약탈에 나설 무렵에는 5척의 선단을 거느릴 만큼 세를 불렸다. 작은 호위선들부터 무력화하고 주선을 쫓은 그는 2시간여의 선상 전투끝에 배를 장악했다. 배에는 60만파운드(2010년 기준 5,200만파운드) 상당의 금은보화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해적질 1년 만에 ‘성공적으로’ 은퇴했다. 100여명의 선원들 중 체포돼 처형된 이는 24명에 불과했다. 에이버리는 해적들의 피난처로 악명 높던 뉴프로비던스의 총독 등에게 돈을 주고 사면을 청했다가 실패했다. 당국과 현상금 사냥꾼은 그를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체포는커녕 목격담조차 공식적으론 없다. 설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데, 그중에는 그가 ‘돈세탁’을 하려다 지주 사기꾼에게 속아 알거지가 됐다는 것도 있다. 어쨌건 그와 그의 해적들이 훔친 보화는 거의 회수되지 않았고, 그는 전설이 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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