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제목부터 해명하고자 한다. 제목의 교육은 대학입시와 대학에 잔뜩 초점이 맞춰져 있는 우리 사회의 교육을 가리키고, ‘삶-공부’는 삶이 곧 공부라는 뜻이다. 살아감과 공부는 한 몸이라는 얘기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타고난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태어나자마자 배고프면 우는 것처럼 배우지 않고서도 ‘할 줄 아는’ 것이 양능이고, 갓난아기라도 엄마를 사랑할 줄 아는 것처럼 생각해본 적이 없어도 ‘알 줄 아는’ 것이 양지다. 사람 모두는 무언가를 할 줄 알고, 알 줄 아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게 된다는 견해다. 성선설을 주장했던 그는, 사람은 본성이 선하기에 배운다고 단정했다. 배움을 사람의 본성으로 본 것이다.
순자도 배움을 인간의 본원적 역량으로 규정했다. 성악설을 집대성하는 등 맹자와는 사뭇 다르게 공자를 계승한 그였지만, 사람은 악한 본성을 다스릴 수 있는 ‘행위 하는 역량’과 ‘따져 아는 역량’을 기본으로 타고난다고 보았다. 인간 본성을 선하게 봤든 악하게 봤든, ‘아는 역량’을 사람의 본질로 본 점에선 동일했던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해선 견해가 극단적으로 나뉘어도 인간을 ‘호모 스투덴스(homo studens)’, 곧 배우는 존재로 규정함에는 이견이 없었음이다.
인간 본성을 상반되게 바라봤음에도 인간이 배우는 존재라는 데 견해가 일치됐던 까닭은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간명하다. 살아가기 위해선 배움이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할 줄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타고난 ‘할 줄 앎’과 ‘알 줄 앎’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바를 배워감으로써 삶이 꾸려진다. 배움은 이렇게 살아감의 시작이고, 살아감은 배움을 실천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살아감이 자체로 배움이 되는 이유다.
특히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한 번 배우면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무엇을 배우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삶의 편의를 위해선 배운 바를 수시로 익히는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 주어진 조건에서 배운 바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면 어찌됐든 실보다는 득이 많기에 그렇다. 공자가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며, ‘학(學)’ 그러니까 배움만을 기쁨의 원천으로 보지 않고, 익힘 즉 ‘습(習)’을 그에 합쳐 기쁨의 원천으로 제시한 까닭이다. 익힘을 통해 살아감 속에서 배움을 지속할 때엔 이런 이점도 있다는 얘기다.
살아감이 배움인 또 다른 이유는 배움의 주체인 나도 변하고 내가 속해 있는 세상도 변하며 학습 대상도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구구단이지만 어렸을 때 용처와 고등학생 때의 용처, 어른일 때의 용처는 사뭇 다르다. 지난 시절, 학동들은 글자를 익히는 데 천자문을 활용했지만 선비들은 우주의 섭리를 전하기 위해 천자문을 활용했다. 나이를 더해가든 사회적 지위가 변하든, 내가 변하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도 변하니 이미 배운 바라도 다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가 빨라, 빠른 변화가 오히려 일상이 된 사회서는 말할 나위조차 없어진다. 온고지신, 그러니까 옛것을 익힘과 동시에 새것을 알아야 이로웠던 시대가 가고, 새것을 알아감만으로도, 아니 새것을 계속 알아가야만 이로워지는 시대가 됐기에 그렇다. 지식이 자본주의적 이윤 창출의 자산으로 포섭된 지식 기반 사회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지금까지 이윤의 지속적 창출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그것은 산업 기반에서 금융 기반으로, 다시 지식 기반으로 탈바꿈하며 이익을 실현해왔다. 새로운 산업을 계속 만들어냈고, 그렇듯이 금융상품을 거듭 고안해냈으며, 지금도 이윤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갱신하고 창조해내고 있다.
단적으로 살아감, 그러니까 삶이 곧 공부인 것은 흘러간 시절에나 적용되던 통찰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는 오늘날에 오히려 더욱 잘 들어맞는 통찰이란 것이다. 이것이 “교육 너머의 삶-공부”라는 화두를 꺼내든 이유다. 대입과 대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작금의 교육을 넘어 살아감의 차원에서 교육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대입제도 개편은 현재 중3인 학생의 대학입시 문제만이 아니라 그들의 살아감, 곧 인생의 문제다. 대학 구조조정이나, 기재부가 예산 전액을 삭감한 공영형 사립대학으로의 전환은 대학을 소유한 사학재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삶-공부란 차원에서 교육을 재구성해야 하는 까닭은,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체력과 지력이 떨어지지만,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기계는 갈수록 강해지고 똑똑해지기 때문이다. ‘미디어 인간’이라 규정될 정도로 사람의 기계에 대한 의존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과학기술 덕분에 100세 시대는 이미 시작됐고, ‘인생 n모작’의 실현 없이는 인간다운 중장년, 노년의 삶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삶-공부가 21세기 우리 사회의 기본이 돼야 하는 까닭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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