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회사 후배들은 요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웃는다. 나의 재치를 세상이 뒤늦게 알아 본 건가, 착각하면 안 된다. 회사를 오래 다녀서 ‘힘’, 딱딱한 말로 하면 ‘위력’이 생긴 것뿐이다. 웃으라고 지시한 것도 아닌데 내가 기뻐할 것 같아서 후배들은 웃어준다. 내가 회사를 더 오래 다니면 물개 박수도 칠 거다. 나는 어쩌면 그 웃음에 중독될 거다. 웃지 않는 후배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할 거다. 그게 위력의 작동 방식이다.
안희정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위력 없는 별나라에서 나고 자란 것 같다. 안씨는 위력을 갖고 있었으나 김지은씨를 간음하는 순간엔 그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스위치 내려 전기 끄듯 위력도 잠시 비활성화 할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가.
위력은 존재 자체가 행사다. ‘사람’이 아니라 ‘자리’에서 나오는 힘이라서다. 대중탕에서 알몸으로 만나도 상사는 상사다. ‘야자 타임’ 하자는 윗사람 말에 정말로 “야! 자!” 하면 바보다. 가능성은 선택할 때 가능성이 된다지만, 위력은 언제나 위력이다. 재채기, 사랑보다 숨기기 어렵다. “지금 네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나는 충남도지사이자 차기 대선주자이자 너의 인사권자인 안희정이다”고 알려줘야 위력인 게 아니다. “너를 안으려는 나는 앞으로 10분간 자연인 안희정이다”고 구슬렀다 해도 김씨 눈에 ‘지사님’으로 보였다면 위력이다.
나는 오너 아들이므로 계약 연장을 앞둔 비정규직인 네 몸을 구석구석 주무르겠다, 내가 인사고과 짜게 주면 너는 올해도 승진하지 못할 테니 당장 담배를 사다 바쳐라… 위력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뭐든 그냥 되는 힘이 위력이다. 안씨가 그걸 몰랐을까. “담배”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비서가 호텔방까지 담배를 대령하는 세상에 살면서 정말로 몰랐을까.
재판부는 안씨의 위력이 김씨에게 억압으로 작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위력과 억압을 가르는 경계란 대체 뭔가. 위력은 언제든 얼굴을 바꿔 억압이 될 수 있다. 선하기만 한 위력은 없다. 안씨가 어린 직원들과 맞담배를 자주 피우는,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은 정치인이어서 위력을 함부로 쓰지 않았을 거라는 재판부의 논리는 빈약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밥 자리에서 허물 없이 수시로 코를 풀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스타킹을 구멍이 날 때까지 신었다. 그래도 위력을 잘만 휘둘렀다.
약자들은 위력의 냄새를 귀신처럼 맡는다. 위력이 그들의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위력은 어쩌다 나타나는 거창한 힘이 아니다. 카카오톡 대화창에 “네”라고 쓸지, “넵!”이라고 쓸지, “네에-”라고 쓸지 고민하게 하는 것도, 과장님이 짜장면 시켰는데 나는 볶음밥 시켜도 될지 망설이게 하는 것도 위력이라면 위력이다. 위력을 가진 이들은 위력을 모르고 산다. 내키는 대로 무심하게 사는 게 그들이 누리는 권력이다. 재판부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기에 위력이 없었다는 안씨 말만 귀담아 들었는가.
“(안씨의 간음이) 사회적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하거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최소한의 회피를 했어야 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김씨를 참게 한 그 힘이, 재판부가 행사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로 그 위력이라는 걸 왜 모르는가. 노래방에서 블루스 추자고 손을 잡아 끈 선배가 있었다. 뒤끝이 긴 걸로 이름 난 사람이었다. “저는 이렇게 혼자 막춤 추는 거 좋아하거든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에 맞춰 정신없이 몸을 흔들며 끝까지 선배 눈치를 본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아닌데요, 아니에요”라고 김씨처럼 고개 숙이고 소심하게 항의할 용기조차 내겐 없어서 혼자 춤을 췄다. ‘깡’으로 산다는 기자인데도, 김씨가 당한 일에 비하면 별 거 아닌데도 그랬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다가는 이상한 여자 아니면 꽃뱀이 되고 마는 세상이어서 그랬다.
최문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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