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마크ㆍ프로 못 뛴 무명 출신
성남 우승 이끌며 지도력 검증
밤새 상대팀 비디오 분석은 일상
틈나면 남미ㆍ유럽 찾아 전술연구
金 아니면 낙인 찍히는 AG
27일 우즈벡과 운명의 8강전
“우리나라 축구 금메달 딸 수 있습니까?” “손흥민이 군대 면제 받을 수 있을까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은 ‘손흥민 대회’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온통 남자 축구의 우승, 손흥민(26ㆍ토트넘)의 병역 면제에 관심이 쏠려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에 운명이 결정되는 사람은 손흥민 하나뿐이 아니다. 나머지 19명의 선수도 그렇지만 지휘봉을 잡은 김학범(58) 감독도 이번 대회에 인생을 걸었다.
한국은 27일 오후 6시(한국시간) 강력한 우승후보 우즈베키스탄과 8강전을 치른다. 금메달을 향한 첫 번째 고비다.
김학범. 일반 팬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그는 선수시절 무명이었다. 태극마크는 고사하고 프로에서도 못 뛰었다. 실업팀 국민은행에서 은퇴한 뒤 은행 직원으로도 일했다. 1992년 지도자로 변신해 수석코치로 성남일화(성남FC 전신)의 3연패(2001~2003)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2005년 감독으로 성남의 우승을 이끌었다. 도시민구단 성남FC와 강원FC에서는 시즌 도중 지휘봉을 잡아 강등권에 빠진 팀을 1부에 잔류시켰다.
김 감독은 틈만 나면 자비로 남미와 유럽을 방문해 수준 높은 리그를 보며 전술을 익힌다. 그가 최고 지략가로 인정받는 비결이다. 밤을 새 비디오 분석에 매달리는 건 일상이다. 눈이 아플 때까지 보면 빈틈이 보인다는 지론이다.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해 실력으로 살아남았지만 그 동안 대표팀 사령탑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표선수 한 번 못 해본 사람이 머리 큰(자부심 강한) 애들을 지휘할 수 있나?’ 한국 축구의 헤게모니를 쥔 이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이런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해 말 부임한 김판곤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은 투명한 선임 절차를 거쳐 과감하게 김학범 감독을 선임했다. 김 위원장도 선수시절 국가대표를 해본 적이 없다. 아시안게임 감독 최종면접에서 김학범 감독은 대회 참가 24개국의 전력을 낱낱이 분석한 프리젠테이션으로 선임위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김학범 감독은 아시안게임 대표 명단을 발탁하며 공격수 황의조(26ㆍ감바오사카)를 와일드카드(23세 초과)로 뽑았다. 황의조가 과거 김 감독 제자였다는 이유로 ‘인맥 축구’ 논란이 일자 그는 “선수 선발에 학연, 지연, 의리는 없다. 나도 이런 것 없는 환경에서 살아남았다”고 일갈했다. 황의조는 이번 대회 5골로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에 1-2로 진 ‘반둥 참사’는 김학범 감독답지 않은 실수였다. 너무 일찍 로테이션(1차전에 비해 6명의 선수를 교체)을 돌린 게 패인이었다. 다행히 빠르게 수습했다.
말레이시아전 직후 그는 “감독인 내 판단 미스”라고 인정해 초기 진화에 성공했다. 특정 선수 이름을 거론했거나 탓 하는 기미였다면 성난 여론은 걷잡을 수 없었을 거다. 16강에서 ‘숙적’ 이란에 깔끔한 2-0 승리를 거둬 우려를 잠재웠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쉬운 목표가 아니다. 한국은 1986년 서울, 2014년 인천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모두 안방이었다. 원정 대회 우승은 40년 전인 1978년 방콕 대회(북한과 공동우승)가 마지막이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은 ‘금메달’ 아니면 실패로 낙인 찍히는, 지도자에겐 잔인한 대회다. 경기력이 좋아도 우승 못하면 지휘봉을 내려놔야 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대표 경험 없는 지도자가 손흥민 같은 ‘대스타’를 데리고 아시안게임 정상 고지를 밟을 수 있을까. 김학범의 도전은 수많은 ‘비주류’ 지도자의 도전이기도 하다.
윤태석 기자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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