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40년만에 되살아난 계엄령 망령
기무사 문건은 친위 쿠데타 기획안
박근혜 등과의 교감 여부 규명해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내려야 비상을 시작한다.” 헤겔은 이 유명한 글을 통해 지식인의 운명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그리스 속담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혜의 신을 의미하는 바, 지식인은 역사적 사건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사후적인 해석만 할 따름이라는 자조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며 많은 글을 쓰면서 살아왔지만, 잊을만 하면 한번씩 헤겔의 자조를 실감하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회창이 대결한 2002년 대선이 한 예이다. 당시 ‘2030 대 5060’ 구도의 세대갈등이 전면화했다. 이와 관련, 출구조사에서 실시한 심층조사 결과를 보고 놀랐다. 청년세대가 노령세대에 비해 대부분의 문제에서 특별히 진보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데 두 문제에서 차이가 컸다. 그것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태도였다. 한마디로, 노년세대가 냉전적이라면 젊은 세대는 탈냉전적이었다. 이를 보고 앞으로 탈냉전 세대가 점점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최대 적은 시간이며, 한나라당이 냉전적 극우노선을 벗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 대통령선거와 같은 전국적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무현정부 중반이 되자 청년실업, 집값 폭등 등과 관련해 대학생과 2030사이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이 폭등했고 2007년 대선에서 세대변수는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 같은 결과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헤겔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부끄러워했다.

최근 들어서도 또 다시 이같은 부끄러움을 절감했다. 기무사령부의 계엄령 문건 때문이다. 한국현대사에서 계엄령 선포는 11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다 1970년대 이전에 선포된 것이고 마지막 계엄령을 선포한지 근 40년이 지났다. 특히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해 정치군인을 숙청하고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립했다. 따라서 한국정치를 전공한 학자로서 이제 계엄령은 한국현대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먼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엄령 문건을 읽어보니 내가 얼마나 엉터리 같은 ‘삼류 정치학자’였는가를 실감했다. 일각에서는 이 문건이 단순히 비상상황을 고려해 검토해본 문건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전문을 읽어본 결과 그것이 아니었다. 왜 이 문건을 하필 기무사가 만들었는가라는 문제는 이미 지적된 문제인 만큼 접어두더라도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법에는 국무회의가 계엄선포 여부를 결정하고 대통령이 최종 승인하도록 되어 있다. 헌데 계엄사 문건은 보안을 이유로 소수 군인들이 모여 결정하는 것으로 상정했다. 게다가 다양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것으로 미리 결론을 내렸고 계엄사령관까지 규정을 어기고 자기들 사람으로 내정했다. 한마디로, 체제유지를 위한 집권세력의 친위쿠테타 기획안이다. 다만 박근혜나 황교안 당시 대통령권한대행 등과 교감이 있었던 것인가가 규명돼야 할 문제이다. 그 내용도 방송국을 KBS1로 단일화하고 각 부서에 군 요원들을 파견해 협조하지 않는 공무원은 전부 체포한다든가, 군법재판소를 열어 계엄령 어기는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든가, 모두 끔찍한 것들이다. 그리고 국회가 계엄령 해제안을 통과시키려 할 경우 국회의원을 현행범으로 체포해 정족수에 미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계엄이었던 80년 봄 기자생활을 하면서 계엄사령부를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의 만행을 체험한 바 있다. 특히 5ㆍ18항쟁을 불순세력의 잠입에 의한 폭동으로 보도하라는 계엄지침에 저항해 제작거부 운동을 하다 유학을 떠나야 했기에 이번 문건은 더욱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 문건의 덕을 본 것도 있다. 간담이 서늘해져 유례없는 폭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계엄령 문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지식인의 부끄러운 운명에 대해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언제까지 황혼이 내리고 나서야 비상을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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