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18만 일, 430만 시간
꼭 ‘무병’의 천운을 타고난 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100살까지 거뜬히 장수한다는 일명 ‘백세 시대’. 길어진 것은 사람의 수명만이 아니다. 한 세기에 가까워진 인간의 삶이 다할 때까지, 심지어는 그 자손의 자손이 여러 번 죽고 다시 태어날 때까지 불멸한다는 이것. 다름 아닌 플라스틱이다. “500년.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숫자죠. 그럼 과연 이 시간이 지나면 썩을까? 근거는 없어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플라스틱을 쓰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00년도 되지 않았거든요. 말하자면 500년이란 그런 숫자예요. ‘인간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가장 긴 숫자’.” (터치포굿 박미현 대표)
그렇다. 500년이란 ‘왜 아직 썩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을 사람들이 이미 죽고 사라져 버렸을 시간.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 나가며 페트병에 든 물을 마셨다면, 그 병은 썩지 않고 이 땅의 어딘가에 뒹굴고 있겠지만 그 존재를 기억할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 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게 ‘썩을 수 있을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길이니.”
그런데도, 한 사람이 1년간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의 양은 100㎏에 육박한다. 플라스틱 매트리스 위에서 일어나 플라스틱 변기 뚜껑을 열며 시작하는 아침, 하루를 깨울 모닝커피가 담긴 컵까지 온통 플라스틱 세상이다. 이쯤 되면 ‘분리수거도 꼬박꼬박 하는데, 재활용되니 괜찮은 거 아니냐’는 질문이 절로 튀어나온다. “맞아요. 분리수거율로만 따지면 OECD에서 2등이거든요. 엄청 잘하고 있는 거죠. 근데 재활용은? 버리는 양의 반도 안되고 있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예쁘게 버리고 재활용은 안 하는 나라.”
그래서 이들이 나섰다. 도처에 널린 ‘애증의 플라스틱’, 줄이는 것만으로 역부족이라면 제대로, 다시 써보는 건 어떨까. 화장품 공병ㆍ자동차 범퍼를 잘게 쪼개 만든 ‘비즈 줄넘기’, 페트병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담요’, 버려진 플라스틱 반찬통 등을 재가공해 만든 ‘블록 수납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10년 전만 해도 모두가 갸웃했던 ‘업사이클링’(재활용품에 디자인 또는 활용도를 더해 가치를 높인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란 개념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1세대 사회적 기업 ‘터치포굿’의 이야기다. “내가 지난주에 버린 쓰레기의 양이 10㎏이라면, 이번 주에 새롭게 사들인 물건 중 적어도 반 정도는 버려진 것들로 만들어진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거기에서 출발했죠.” 버려진 물건들과 새롭게 태어난 물건들이 어지러이 섞여있는 서울 마포구의 터치포굿 사무실에서 박미현(34) 대표를 만났다.
◆재활용 마크 붙어있지만 재활용 안 돼
올봄 나라를 들썩이게 한 ‘플라스틱 대란’은 세계 재활용 쓰레기의 절반 이상을 처리하던 중국이 ‘더 이상 쓰레기를 수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이 ‘초비상 사태’에 돌입한 것은 당연지사. “그동안은 골치 아픈 플라스틱 쓰레기를 중국이 다 가져가 줬으니까 아무 탈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거죠. 실은 떠넘기기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문제’로 여겨지기 일쑤. 모두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던 3년 전, 터치포굿의 고민은 시작됐다. “화살표 세 개로 만들어진 이 세모 마크. 이것만 붙어있으면 다 재활용이 되는 줄로만 알았죠. 아니었어요. 브랜드 라벨이 접착제로 덕지덕지 붙은 것, 소비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각종 색소가 첨가된 것, 여러 가지 플라스틱 재료들을 혼합해 만든 것…. 재활용 마크는 다 붙어있지만 정작 재활용은 할 수 없는 플라스틱이에요.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 대다수가 이랬죠.” 문제는 심각했지만 알리자니 망설여졌다. ‘대안 없이 판을 흔드는 꼴’이 될까 봐. 그래서 직접 나서 대안을 찾기로 했다. “업사이클링 업체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결국은 다시 쓰게 하는 것이었죠.”
“플라스틱은 기름을 원료로 하기 때문에 유가 영향을 많이 받아요. 유가가 떨어지면 플라스틱 가격도 떨어지는데, 이렇게 되면 재활용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하죠. 버려진 플라스틱을 씻고, 부수고, 재가공하는 비용이 새로 만드는 비용보다 더 드니까. 아무도 재가공품을 찾지 않는 거죠.” 이들의 대안이란 ‘고부가가치’ 디자인 상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재활용 소재의 공급이 사라지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수요를 창출하기 위함이었다. 자동차 업체에서 받은 범퍼나 화장품 제조사에서 받은 공병을 재가공해 만든 ‘비즈 줄넘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만원 넘게 팔리는 시중 제품 가격을 고려해 적정한 값을 매기니 재활용품 가공업체에 훨씬 많은 이윤을 남겨줄 수 있었다. “보통 재활용 플라스틱은 싼값의 파이프 만드는 데나 공급이 되거든요. 저희는 줄넘기를 제작해서 100원 남을 걸 200원을 남겨드리곤 했던 거예요.” 가공업자들이 계속 재활용 소재를 찾는 ‘유인’을 제공한 셈이었다.
“아, 그리고 그거 아세요? 플라스틱도 다 같은 플라스틱이 아니라는 거.” 재활용에 좋은 플라스틱과 그렇지 않은 플라스틱이 따로 있었다. “이 음료수병을 보세요. 몸통은 ‘PET’(페트) 소재인데 뚜껑은 ‘PP’ 소재거든요. 이 둘은 녹는점이 달라서 한 번에 가공하는 게 정말 힘들어요. 그래서 품질 좋은 100점짜리 플라스틱과 완전히 최악인 1점짜리가 한꺼번에 공장에 들어가면 딱 10점짜리 플라스틱이 나오죠. 아,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재활용 업자들이 ‘말도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던 걸 이들이 해냈다. 제품 밑바닥에 조그맣게 적힌 소재 표시를 보고 ‘100점짜리’만 골라내는 일에 전 직원이 투입된 것.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100점이었다. “쓰레기장에 무작위로 들어가 한 일은 아니었어요. 플라스틱 병에 화장품을 담아 팔 수밖에 없는 화장품 제조사와 손을 잡았죠. 기업이나 기관이 지속적으로 버리는 폐기물에 ‘업사이클링 솔루션’을 제시하는 게 사실 저희의 주요 업무거든요.” 이렇게 만들어진 100점짜리 소재로 새로운 화장품 병을 만드는 게 이들의 목표다. “물론 소비자들이 민감해할 ‘화장품이 닿는 부분’은 새 플라스틱으로 처리할 예정이랍니다.”
‘비즈 줄넘기’를 이을 제품들도 줄줄이 등장 중이다. 페트 플라스틱에서 실을 뽑아내는 기술은 널리 알려진 리사이클링 기법이지만, 터치포굿은 기존의 부드러운 섬유가 아닌 빳빳한 ‘펠트’ 소재로 재탄생시켰다. “표면에 붙는 브랜드 라벨지를 접착제가 아닌 열로 부착하는 일본 페트병은 부드러운 섬유를 만들기에 제격이지만, 한국 페트는 그렇지 않아요. 표면에 붙은 본드가 너무 많아서 기계를 상하게도 하고요. 그래서 다른 섬유를 만들어 본거죠.” 힘 있고 거친 원단이다 보니 활용도는 더 컸다. 가방과 파우치에 쓰이던 이 원단은 한 업사이클링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모자와 신발이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수납용은 물론, 선물 박스나 테이블로도 이용이 가능한 레고형 블록 박스를 내놓았죠.” 플라스틱 반찬통을 만드는 기업이 내놓은 폐플라스틱을 이용한 결과물이다. “1개가 생산될 때마다 1.2㎏의 플라스틱이 재활용되는 식이랍니다.”
◆“버려지는 모든 것은 시간과 추억의 매개체”
“처음 플리마켓 나갔을 때가 아직도 생각나요. ‘어머어머, 예쁘다! 이거 뭐야?’ 하면서 다가오는 분들이 꽤 있었거든요. 저희가 의욕에 가득 차서 ‘이건, 버려진 간판으로 만든 거고요~ 또 이건 뭐냐면…’ 설명을 시작하니까 바로 뒤돌아 서서 가시더라고요. ‘뭐야? 쓰레기로 만든 거야? 더러워’라면서…”
2008년 ‘버려지는 자원과 버리는 마음을 터치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출발한 터치포굿은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10년 전엔 ‘버려지는 무언가로 만들어진 상품을 내 돈 주고 산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업사이클링 브랜드계의 대모 격이 된 스위스 업체 ‘프라이탁’(트럭의 방수천을 이용해 방수가방을 만드는 브랜드)조차 생소했다. “완전히 극과 극이었죠. 프라이탁은 가격대가 수십 만원 대잖아요. 그런데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제품은 시민단체가 버려지는 현수막을 찢어서 만든 장바구니 정도가 다였어요. 값도 받지 않고 그냥 나눠 주는…” 비싸거나 공짜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값을 주고 사기엔 어쩐지 찝찝하고, 디자인이랄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재활용 상품에 갖던 편견이었죠. 그렇다고 사람들의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좋은 전략이 아니었어요.” ‘업사이클링’이란 생소한 용어를 내세운 이유다. ‘재활용’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포지셔닝을 새롭게 한 것. “다행히 의도했던 바가 잘 먹혀 들어갔죠. 지금은 마니아층까지 생겼을 정도예요.” 현수막 에코백에 잘려 들어간 몇 가지 자모음을 보고 ‘전체 문구’를 완성해보는가 하면, 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재활용 전의 원재료를 추리해보는 열성 고객들이 드물지 않다.
터치포굿의 업사이클링 소재는 플라스틱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 현수막부터, 평창올림픽 성화대 합판까지 말 그대로 ‘대상 불문’이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당시, 남북한 선수가 함께 보폭을 맞춰 성화대를 오르던 그 모습, 기억하시죠? 그런데, 그 성화대가 대회 폐막과 동시에 버려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냉큼 가져왔죠.” 우연히 온 기회는 아니었다. 2016년부터 무려 2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다. ‘이미 끝나버린 축제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평창에서 버려지는 자원들로 어떤 물건을 만들든, 반드시 올림픽 기간 내 홍보가 돼야 한다는 것이 ‘제 1의 철칙’이었다. “개막식이 끝남과 동시에 시제품을 공개했어요. 성화대 슬로프 모양, 평창의 자음 ‘ㅍ’과 ‘ㅊ’의 형상을 각각 본뜬 램프 스탠드였죠. 이미 제품 디자인까지 끝낸 상태였거든요.” 19대 대선 당시, 선거기간 중에 현수막 에코백을 예약 판매했던 경험이 밑거름이 된 결과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역사의 한 조각을 가져갈 수 있다, 그 사실만이 주는 벅찬 느낌이 있어요. 그걸 공략했던 거죠.” 이들의 철학을 알아봐 준 ‘착한 소비자’들이 적지 않았다. 쓸모나 기능성보다 가치와 스토리에 주목한 소비자들은 주저 없이 지갑을 열었다. “‘버려지는 모든 것들은 시간과 추억의 매개체’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는 저희의 신조랍니다. (웃음)” 그래서 이들은 오늘도 냄새나는 쓰레기 더미를 헤치며 누군가의 시간과 추억을 건져 올린다.
◆‘쓰레기 공화국’의 상식 바꾸기는 계속된다
이들은 올해 초 ‘재활용 소재계의 동대문 시장’을 열었다. 무려 600여 개의 재활용 소재를 보유한 ‘소재 중개소’다. “동대문 시장에 원단 떼러 가듯이 저희 소재 중개소에 오시는 거죠. 예를 들어 ‘나는 두꺼워서 주름이 안 가는 천이 필요합니다’라고 요청을 해오시면 ‘군용 텐트가 좋겠군요!’라고 솔루션을 드려요.” 업사이클링 업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업체다 보니 저절로 쌓인 재활용 소재 데이터가 많았다. “’우리가 이런 쓰레기를 가지고 있는데 좀 가져가 달라’는 문의 전화가 정말 많이 왔어요. 이걸 다른 업사이클링 업체에선 굉장히 부러워하더라고요. 재활용 상품을 만들고 싶어도 ‘도대체 뭘 가지고 만들어야 할지’ 막막해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죠.” 그래서 폐기물 재가공 업체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제작자들을 연결해주는 ‘매칭 시스템’을 개발한 것. “일회용품 공화국’인 이 나라 전체에서 업사이클링 산업 자체가 더 커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답니다.”
서울에만 90% 가까이 집중돼 있는 업사이클링 생태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것 또한 창업 10주년을 맞은 이들의 새로운 목표 중 하나란다. “아직도 지방에선 ‘뭐, 재활용 상품이라고? 더러워!’ 하시는 분들, 꽤 있으실 거예요.” 한 시대의 상식이 변하기에 10년이란 분명 짧은 시간, 그러나 어느덧 이들이 쏘아 올린 질문들이 ‘온 세상의 화두’가 되는 날이 이렇게 왔다.
“‘어떻게 덜 쓸까’에서 시작해 ‘어떻게 다시 쓸 수 있을까’까지 확장되는 고민을, 남녀노소 누구나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세상. 언젠간 오지 않을까요?”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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