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 새댁, 건강 안좋아 퇴사
회사 부탁으로 복직했다 참변
30여년 청춘 바쳐 일한 베테랑
못피한 동료 챙기다 대피 못해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였던 이들의 삶이 예기치 못한 화마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가족여행이 설레기만 했을 신입사원, 사람이 부족하다는 회사 부탁에 급히 달려와줬던 3년 차 주부, 30년 일하며 청춘을 모두 회사에 바쳤던 베테랑 직원 등 희생자들은 불이 난 공장을 끝끝내 제 힘으로 빠져 나오지 못했다. 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인천 남동공단 세일전자 제조공장에는 사고 다음날인 22일 “우리는 이렇게 죽어서 오라고 회사를 보낸 적 없으니 살려내고, 돌려내라”는 남은 가족들의 원망만이 서려 있을 뿐이다.
공장 4층 전산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신화연(25)씨는 세일전자에 입사한 지 4개월밖에 안 된 수습 사원이다. 신씨는 협력업체 소속으로 세일전자에서 파견 나와 일을 배우고 있었다. 인쇄회로기판(PCB) 제품을 검수하고 포장하는 공장 4층에서 그는 컴퓨터 업무까지 도맡아 이날도 4층 이곳 저곳을 바삐 움직였다고 한다. 주간(오전 8시~오후 8시), 야간(오후 8시~오전 8시) 근무를 2주씩 번갈아 가며 토요일에도 일하는 날이 많았다는 게 가족들 얘기다.
쉼 없이 달려온 신씨는 이번 주 토요일만큼은 쉬려 했다. 아버지 생일을 맞아 가족이 다 함께 국내 여행을 떠나기로 돼 있었다. 동생(22)은 “언니는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주어진 업무를 모두 해내려는 사람이었다. 최근에는 광복절에도 출근한 걸로 알고 있다”며 “이런 언니가 모처럼 가족들과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이젠 못 가게 됐다”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사망자 중엔 신씨 외에 협력업체 직원이 3명 더 있다. 정인덕(53)씨는 최종검사 업무를 했고, 최승주(59) 이미숙(51)씨는 식당에서 일했다. 완제품 회로의 오류를 잡아내는 업무(BBT)를 담당한 김진구(38)씨는 세일전자 계약직이었다.
이혜정(34)씨는 떠났던 회사를 다시 돌아왔다 변을 당했다. 5년 전 세일전자에 들어가 일하다 3년 전 결혼한 뒤로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그런데 회사는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 “인력이 부족하니 다시 와서 일해달라”고 부탁했다. 회사는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아 업무 경력이 있는 직원들 위주로 운영되고 있었다. 회사는 2016년 5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씨 아버지(59)는 “다시 일 해달라고 부탁을 했으면 회사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왜 우리 딸을 죽어서 오게 만드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애자(51)씨는 세일전자가 세워진 1989년부터 지금까지 30년 역사를 함께 했다. ‘다니기 힘든 회사’라는 평이 최근 들어 인천 남동공단 전자업계에 자자해도 그는 아직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있다면서 회사를 그만 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불이 났을 때도 혼자 빠져 나오지 않았다. 4층 작업실(검사룸)로 달려가 닫힌 문을 두드리며 미처 피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불이 났단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대피할 시간을 놓쳐버렸다. “회사 관리자들은 멀쩡히 도망갔는데 도저히 혼자 빠져 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야. 우리 조카들 엄마, 나의 언니는 그렇게 30년 다닌 회사에서 죽었어.” 그의 친동생은 이렇게 말하고는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