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이경미 ‘잘돼가? 무엇이든’
계획대로 안 풀리는 인생
차라리 웃자고 써 온 글 묶어
올해 13세 연하 평론가와 결혼
“다문화 가정의 가장 됐어요”
그의 호는 ‘괴랄’이어야 마땅하다. ‘괴이’와 ‘X랄’이 만나 ‘무지 이상한데 어쩐지 귀여움’을 가리키게 된 말이 그의 이름을 따라다닌다.
‘미쓰 홍당무’(2008), ‘비밀은 없다’(2016)를 만든 이경미 영화감독(46) 말이다. 그가 산문집 ‘잘돼가? 무엇이든’을 냈다. 저자의 이름에 걸맞게 ‘웃기는’ 책이다. “인생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 혼자 끼적이던 15년의 부끄러운 기록들”을 묶었다. 책은 일단 잘 돼가고 있다. 출간 한 달 만에 7쇄, 2만부를 찍게 됐다.
얼마 전 만난 이 감독의 첫인상은 ‘괴랄’하지 않았다. “저 사실 웃기는 사람 아니에요.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없어요. 아주 가까운 사람 말고는요. 글이 웃긴 건 제가 읽어서 재미없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아서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웃지 않았다. 이 감독의 글은 ‘웃기나 하자’고 쓴 게 아니다. ‘차라리 웃자’고 쓴 글이다. 사는 게 대체 왜 이런지를 씹고 씹어 유머로 토해 냈다. “나의 철없고 부실한 농담들이 계획대로 가지지 않는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작은 웃음이 되면 참 좋겠다”면서.
이 감독은 영화에 인생을 건 시네필은 아니었다. 작은 회사를 다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도망쳐서 영화감독이 됐다”고 책에서 고백했다. 첫 장편 ‘미쓰 홍당무’는 “사랑하던 유부남이 내 친구랑 바람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열 받아서 쓴 이야기”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영화가 이제는 인생이 됐다. 인생이니, 당연히 쓰다. 시나리오 작업이 괴로울 땐 “실연당하는 게 끔찍할까, 시나리오 쓰는 게 끔찍할까”를 고민한다. “딱 반만 죽여 놔서 내가 지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는” 영화를 원망한다. 그래도 영화를 하는 건 “고통은 긴데 짧은 기쁨이 워낙 커서”다. “뭔가를 쓰고 만들어서 보여 주고 싶다는 에너지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듯 해요. 다음 영화를 곧 시작하게 될 것 같고요.”
이 감독을 만나기 직전, 안희정씨가 성폭행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여성들은, 힘없는 이들은 어찌해야 할지 물었다. “포기하지 말아야죠. 이민 간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가 달라지겠어요. 세상 다 비슷하죠(웃음). 포기하지 말고 움직여야 해요. 다음 세대의 삶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뭐든 해야죠.” 역시나 성추문으로 얼룩진 영화 판에서 여성인 영화감독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남자들의 세계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처음엔 엄청 애썼어요. 이제는 알아요. 주파수 맞는 사람들은 성별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만나서 같이 가게 돼 있어요. 요즘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기보다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정도예요. 제가 모든 사람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 감독은 올 3월 결혼했다. 그의 결혼은 그야말로 화제를 뿌렸다. 남편은 13세 연하의 아일랜드 태생 영화 평론가 피어스 콘란씨다. “1992년 윤금이 피살사건과 1997년 이태원 살인사건 때문에” 이 감독에겐 “백인 포비아”가 있었지만, “이태원 사는 켈트족 백인”과 사랑에 빠졌다. 흥행에 참패한 ‘비밀은 없다’를 콘란씨가 좋아한 게 인연이 됐다. 콘란씨는 “돈도 없으면서 미안해하지 않아서 참 좋은 백인 이주노동자”이고, 이 감독은 부자가 아니다. 이 감독은 “다문화 가정의 가장으로서 강렬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외국인에게 엄청나게 배타적이더라고요. 백인도 예외가 아니에요. 보증인도, 고정 소득도 있는데 남편 이름으로 신용카드도 만들 수 없어요. 제가 이 가정을 책임져야죠. 전에는 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했는데, 결혼 날짜 잡고 나서는 닥치는 대로 하고 있어요(웃음).”
이 감독은 시댁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고 했다. 최근 이사한 새집 꾸미기도 콘란씨가 전부 다 한다고 했다. 이 감독은 “아이고, 어떡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며 자꾸 웃었다. 승자의 행복한 웃음이되, 어쩐지 씁쓸한 웃음이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했으면 이혼했을 거예요. 제 성질이 못돼서요(웃음). 남자든 여자든 결혼은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결혼 제도가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니까요. 사랑을 하는 일은 되게 중요해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랑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그 환경이 결혼뿐인 건 아니라는 얘기예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이우진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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