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 윤종빈 감독
1990년대 북풍 공작 사건 다뤄
관객 400만 돌파하며 흥행몰이
지난 정권 때 영화 기획 시작
사드갈등에 中 촬영 무산되기도
“이데올로기적 시선 벗어난
개인의 변화가 울림 주길 기대”
거의 다 몰랐고, 알아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기획한 북풍 공작 사건이 영화 ‘공작’으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다. 대북 공작원 ‘흑금성’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4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지난 5월에는 칸국제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았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윤종빈(39) 감독은 흑금성과의 만남을 마치 어제 일인 듯 떠올렸다. “새 영화 아이템을 취재하던 중에 우연히 시사월간지에서 기사를 봤어요. ‘정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나는 왜 몰랐지?’ 연애할 때 이유 없이 빠지듯 이 사건에 본능적으로 빨려 들었어요.”
영화는 1990년대 초 북핵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 고위층에 침투한 흑금성 박석영(황정민)과 북한 외화 벌이를 책임진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동력을 얻는다. 첩보 장르지만 총성 한발조차 없다. 그 대신 칼날을 품은 말들이 난무한다. 상대를 의심하고 시험하는 긴박한 심리전이다. 윤 감독은 “대사를 액션처럼 표현해 달라”고 배우들에게 주문했다.
“박석영과 리명운의 태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길 바랐어요. 흑금성이 선인지 악인지, 그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될지 관객이 몰라야 끝까지 긴장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통제된 연출을 의도했습니다. 배우들은 아마도 손발이 꽁꽁 묶인 느낌이었을 겁니다. 무의식적인 눈 깜박거림에도 긴장감이 깨질 수 있어서 다시 찍기도 했어요.”
윤 감독은 전 대북 공작원 박채서씨의 수기를 기본 줄거리로 삼되 과감하게 각색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에 담기지 못한 이야기 중에는 더 놀라운 비화가 많다. “흑금성이 고분 발굴을 구실로 영변 지역을 둘러보려고 했을 때 북한에서 흑금성에게 북한 여성과 결혼할 것을 제안해요. 신뢰에 대한 담보 같은 것이죠. 흑금성이 그 상황을 슬기롭게 모면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촬영까지 해 놓고 덜어냈습니다. 영화에 담기엔 너무 ‘센’ 이야기였거든요.”
이렇게 센 이야기에 도전한 데는 감독만의 이유가 있다. 흑금성은 조직의 안위를 위해 북한까지 끌어들여 정치 공작을 벌인 안기부에 반기를 든다. 그의 자각과 선택은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지금 시대 정신과 공명한다. “냉전 시대 스파이에게 가장 중요한 건 피아식별이죠. 두 주인공은 적으로 만났지만 상대를 이해하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흑금성은 거기서 오는 딜레마를 외면하지 않았죠. 이데올로기적 시선에서 벗어난 한 개인의 변화가 관객에게 울림을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이 영화 기획은 지난 정권 때 시작됐다. 흑금성이 활약한 20여년 전보다도 남북 관계가 퇴행했던 시절이었다. ‘영화 찍다가 잡혀 가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곤 했다. 윤 감독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데 못 만들게 뭐 있냐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무탈했던 건 아니다. 갑작스런 사드 배치로 중국 촬영이 무산됐다. 급하게 대만으로 촬영지를 옮겼는데도 구상과 다른 풍경이라 불만족스러웠다. 짓궂은 우스갯소리도 덧붙였다. “우리는 대체할 곳이 있었으니 다행이죠.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어떻겠습니까. 하루아침에 폐쇄가 돼버렸으니 말이죠. 지난 정부의 일을 돌아보면 창작자들이 더 분발해야 해요. 국정농단사태 등장인물의 조합만 해도 얼마나 창의적인가요. 스토리텔링도 아주 참신하고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관객을 설득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2005년 중앙대 졸업작 ‘용서받지 못한 자’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다. 화려한 데뷔다. 한국의 물질주의를 다룬 ‘비스티 보이즈’(2008), 아버지 세대를 조명한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 19세기 조선을 비춘 ‘군도: 민란의 시대’(2014)를 차례로 내놓았다. ‘공작’은 다섯번째 장편이다. 윤 감독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 “두 시간짜리 영화를 위해 지지고 볶은 시간을 떠올리면 허무해요. 소꿉장난 한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 영화가 뭐라고 3~4년을 매달렸나. 인생이란 뭘까. 괜한 무력감에 만날 하정우 형을 불러서 술 마시고 그래요.”
그럼에도 윤 감독이 또 메가폰을 잡는 건 “영화가 가장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찬사를 받는 작품은 없다. 많은 관객이 보지 않더라도 확실한 지지자를 남기는 영화는 생명력을 갖는다. 그런 영화를 만들자.” 영화를 만들어 오면서 그가 얻은 신념이다. 그런 윤 감독의 다음 행보는 제작자로 나선 공포영화 ‘클로젯’이다. “9월부터 촬영 시작해요. 정우 형 말동무 해주러 가야죠.”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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