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2013년 청와대에서 만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소송을 늦추는 방안을 협의한 정황이 검찰에 포착됐다.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 고위 인사가 직접 만나 재판 거래로 의심되는 대화를 나눈 사실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최근 외교부 압수수색에서 회동관련 문건을 확인한 검찰은 이를 뒷받침하는 외교부 관계자 진술을 확보한 데 이어 14일 김 전 실장을 소환, 조사했다.
검찰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당시 차 처장에게 청와대의 뜻이라며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판결을 최대한 미루거나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대가로 법관의 해외공관 파견 재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앞서 대법원은 2012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 전범기업들이 재상고하면서 사건이 올라오자 대법원은 첫 판결 때와 쟁점이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5년간 미루다 지난달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김 전 실장이 차 처장과의 회동 때 요구한 그대로 된 것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가 한일 관계 변화를 꾀하기 위해 이런 일을 기획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강제징용 피해자 중 현재 생존자는 3,500명으로 추산되는 데 대부분 고령이다. 이들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하루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대법원이 판결을 미루는 사이 사건 원고 9명 중 7명이 고령 등으로 사망했다. 일제강점기피해자 유족들이 광복절인 15일 집회에서 “재판 거래 의혹을 철저히 규명해달라”고 요구한 것도 이런 이유다.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라면 인권도 역사의식도 팽개친 게 대법원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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