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놀이터는 교회였다. 주일엔 빠지지 않고 교회로 가 신을 찬양했다. 가스펠 가수인 어머니(씨시 휴스턴)의 피와 대모인 솔의 여왕(어리사 프랭클린)의 혼을 물려받아서였을까. 소녀는 11세부터 성가대 맨 앞에서 노래했다. 깜찍한 예명 니피(nippy)와 달리 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어머니는 니피를 사립여고에 보내 그의 삶에 ‘때’가 묻질 않길 간절히 바랐다. 폭포수처럼 시원하면서도 웅숭깊은 목소리로 세계를 사로잡은 ‘디바’ 휘트니 휴스턴은 어머니의 희망과 달리 약물 중독으로 허물어졌다.
2012년 2월 11일. 휴스턴은 한 호텔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돼 결국 사망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23일 개봉)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무대를 누비다 누구보다 외롭게 떠난 디바의 삶을 들춘다.
카메라는 어둡고 차갑다. 다큐멘터리가 집중한 건 휴스턴의 그림자다. “늘 거인에게 쫓기는 꿈을 꿨어요.” 영화는 휴스턴의 뜻밖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디바는 열 여섯 살부터 마약에 손을 댔다. 함께 자란 오빠들이 습관처럼 입에 물던 마리화나와 코카인은 휴스턴의 삶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의 마음에 곰팡이가 자란 게 아니다. 영화는 휴스턴 지인의 충격적 폭로로 디바의 깊은 상처를 보여준다. “휴스턴은 어린 시절 친척 언니인 디디 워윅으로부터 상습적 성추행을 당했다.” 휴스턴의 이모이자 비서였던 메리 존스가 긴 한숨 끝에 휴스턴 대신 세상에 내뱉은 말이었다. 가수이기도 했던 워윅은 2008년 숨졌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초등학생 때 친지에게 큰 상처를 입은 휴스턴은 딸인 크리스티나 브라운을 공연장에 항상 데리고 다녔다. 휴스턴은 누구에게도 딸을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휴스턴은 버틸 수 없었다. 딸의 돈에 눈이 먼 아버지와, 유명 래퍼인 남편 바비 브라운의 폭력은 휴스턴의 멍든 몸과 마음에 결국 금을 냈다. 그렇게 쓰러진 휴스턴을 보내고 3년 뒤인 2015년, 딸도 엄마의 뒤를 따라 세상을 등졌다.
디바를 둘러싼 비극을 영화는 촘촘하게 쫓는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 동료 등 30여 명이 인터뷰로 휴스턴을 증언한다. 휴스턴 가족이 무대 안팎에서 찍은 비디오테이프 등 1,500개가 넘는 영상 자료도 활용됐다. ‘휘트니’는 극과 극을 오간 휴스턴의 삶을 깊고도 넓게 전한다. 방대한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주변 인물까지 조명해 휴스턴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27세에 요절한 영국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다룬 ‘에이미’(2015)보다 ‘휘트니’가 더욱 풍성한 책 같아 보이는 이유다. 케빈 맥도널드 감독이 연출했다. ‘원 데이 인 셉템버’(1999)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최우수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감독이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돼 파장을 낳은 ‘휘트니’는 휴스턴 삶의 진실을 보여주려 애쓴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값진 가수였는지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여자 그리고 피부색이 검은 가수는 온갖 차별을 딛고 미국에서 유리천장을 깨고 세기의 디바가 됐다. 대중이 휴스턴을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극으로 점철된 삶보다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 때문이다.
휴스턴은 1991년 미국프로풋볼(NFL) 슈퍼볼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불렀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이 금지된 1994년 흑인 가수 최초로 현지에서 공연해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를 열창했다. 이 두 순간만으로 휴스턴 삶의 결정적 순간을 되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무대 위 휘트니의 서사가 부족한 영화는 1권이 없는 휴스턴의 자서전처럼 보일 수 있다. 그의 화려했던 무대를 추억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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