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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청개화성(聽開花聲)

입력
2018.08.14 14:29
수정
2018.08.1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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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새벽 동이 트고 햇살이 비치기 전, 연꽃이 몸을 여는 그 청량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옛 선비들은 새벽녘에 말을 달려 연못가에 모였다. 붓과 벼루, 술과 안주는 필수다. 배를 띄워 연못 가운데로 나간다. 이윽고 아침해가 떠오른다. 꽃봉오리들이 기운을 받아 꽃잎을 편다. 여기저기 들릴 듯 말 듯 꽃 터지는 소리. 아이야, 연잎에 술을 부어라. 잔은 필요 없다. 연대 줄기가 있지 않은가. 술이 아니다. 향기를 마시고 소리를 음미한다. 연꽃이 내가 되고 내가 연꽃이 된다. 이게 바로 여름 풍류의 백미, ‘청개화성(聽開花聲)’이다.

다산 정약용은 풍류의 대가였다. 그는 열네 명의 뜻 맞는 초계문신(규장각에서 공부하는 문신)들과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풍류계를 맺었다. 그리고 철마다 모임 날을 정했다. 봄에는 살구꽃 필 때, 여름에는 서련지(西蓮池)에 연꽃이 만개할 때다. 서련지는 인왕산의 화기(火氣)를 잡으려고 서대문(현재의 천연동)에 만든 연못으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연꽃으로 유명했다.

입추가 지난 지 한 주나 됐지만 폭염이 지칠 줄을 모른다. 호캉스나 홈캉스는 알아도 ‘백캉스(백화점)’ ‘몰캉스(쇼핑몰)’ ‘커피서(커피숍+피서)’는 처음 들었다. 너무 덥다 보니 움직이는 것도 고역이다. 그래서 요즘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 stay+vacation)’이 인기라고 한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없던 시절 선현들의 피서법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 옛 선비들이 가장 즐긴 피서는 탁족(濯足)이었다. 좋은 이들과 산수 좋은 계곡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있노라면 온몸이 서늘해진다. 사실 그건 발을 씻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씻는 것이다. 정약용이 여름을 나는 여덟 가지 방법을 말한 ‘소서팔사(消暑八事)’ 가운데도 ‘달밤에 탁족하기(月夜濯足)’가 있다. 얼마나 로맨틱한가.

선조들은 더위 쫓기 명절도 만들었다. 음력 6월 보름날 유두(流頭)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며 부정하고 불길한 것을 씻어 낸다는 날이다. 이날은 식구들이 물가를 찾아 술과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유두잔치라 했다. 특히 한여름에도 치마 속에 속곳, 속바지를 겹겹이 챙겨 입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이날만은 눈총 안 받고 하얀 속살을 드러낼 수 있는 날이다.

더위팔기(매서, 賣暑) 세시풍속까지 발명했던 선조들이다. 정월 대보름에 해 뜨기 전 마주치는 사람에게 “내 더위”라고 외치면 그 사람이 그해 여름 내가 먹을 더위를 가져간다고 했다.

선현의 피서(避暑)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건 피서(披書)다. ‘피(披)’는 단어 피력(披瀝)에서 쓰인 것처럼 헤치고 편다는 뜻이다. 책을 펼치는 것이다. 비교적 가벼운 책읽기에 가깝다. 탁족이나 유두는 하루지만, 양반들은 피서로 피서하기 위해 책을 싸들고 여러 날 산행을 갔다. 최고의 호사였다.

올여름 구립도서관에 자주 들락거렸다. ‘북스테이’까진 못하더라도 나름 ‘북캉스’를 한 셈이다.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참 많이도 온다.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여러 통계로 증명됐다. 대형서점이 발표한 것만 봐도 7, 8월 도서 판매량이 월평균보다 보통 6~9% 많다. 가을은 반대로 그만큼 줄었다.

무더위를 이길 장사는 없다. 선현들의 여름나기를 보면 결국은 마음이었다. 연꽃 터지는 소리를 듣든, 발을 씻고 머리를 감든, 더위를 팔든 그게 다 정신과 연결된 것이다. 이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잊는 것이었다. 자연과 하나가 돼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게 풍류였다. 폭염이 아무리 무섭다지만 내 마음까지 태우겠는가. 결국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걸.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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