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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쉬리’에서 ‘공작’까지

입력
2018.08.13 10:31
수정
2018.08.1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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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는 한국영화사를 이야기할 때 여러 차원으로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를 통해 한국영화는 긴 침체기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열며 블록버스터 개념을 도입한 것도 ‘쉬리’였다. 이 영화를 통해 ‘총기 액션’이 본격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쉬리’를 통해 ‘분단’이라는 테마가 주류 장르 영화의 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분단 상황을 다룬 영화들은 1980년대까지 ‘반공 영화’라는 이름으로 국책 산업처럼 여겨지다가 소멸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쉬리’는 다시 분단을 이야기한다. IMF 구제 금융이라는 남한의 대위기 시절. ‘쉬리’는 한국영화가 한동안 잊고 있던 북한이라는 외부자를 소환하고, 연인이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야 하는 극단적 신파의 상황을 연출하며 놀라운 흥행을 거둔다.

현실은 더 놀라웠다. ‘쉬리’ 신드롬이 미처 가시지 않은 2000년 6월, 분단 이후 남북 정상은 처음 만났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영화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해 추석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는 ‘쉬리’ 못지않은 흥행을 한다. ‘쉬리’가 액션이라면 이 영화는 스릴러였고, 연인 관계 대신 유사 형제 관계가 중심이며, 역시 ‘그럼에도 서로 총구를 겨눠야 하는’ 상황을 다루었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두 영화는 “체제의 대립은 비극을 만든다”는 대전제 속에서 역설적 방식으로 통일의 메시지를 담았다.

이후 이산 가족이 상봉하고, 육로로 금강산 관광이 가능해지고, 개성 공단이 열렸다. 현실에서 분단의 갈등이 조금씩 해소되자 영화는 한동안 분단을 다루지 않았다. 어쩌면 굳이 다룰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햇볕 정책이 사그라든 2010년대부터, 분단이라는 테마는 다시 한국영화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의형제’(2010) ‘간첩’(2012) ‘베를린’(2013)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동창생’(2013) ‘용의자’(2013) ‘공조’(2017) ‘브이아이피’(2017) ‘강철비’(2017) ‘인랑’(2018)… 그러면서 장르의 법칙으로 분단 상황을 해소하려는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첩보 스릴러와 액션 스펙터클은 두 축이 되었고 스파이, 국정원 요원, 탈북자, 범죄자 등의 캐릭터들이 가세했으며, 남성 장르 특유의 거친 감성이 있었다. 남과 북이 다시 멀어지던 시기. 이 영화들은 일정 정도 거리를 둔 채 분단 현실을 반영하고, 갈등 상황을 극화하고, 그것을 주류 상업 영화의 문법으로 포장했다. 여기엔 대부분 위기의 분위기와 비극의 결말이 동반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들은 ‘쉬리’의 후예들이었고, 분단을 토대로 한 장르 판타지였다.

그렇다면 ‘공작’은 흥미롭다. 1990년대 ‘흑금성 사건’을 다룬 실화 영화로서 ‘공작’은 장르의 쾌감을 자제한다. 총격전도 추격전도 없다. 대신 북파 공작원 박석영(황정민)과 북의 간부 리명운(이성민)의 브로맨스에 집중한다. 적대적 공생 관계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남한과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고 있는 북한. ‘공작’은 그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그 막후에서 활동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마치 남북 관계에 대한 애절한 알레고리처럼 보여준다.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야 하지만, 그 속에서 인간적 호감을 느낀 두 남자에게 과연 체제는 무엇이고 따라야 할 대의는 무엇인가. 분단의 질곡에 대해 ‘공작’은 정공법으로 질문하며, 동시에 리명운을 통해 하나의 사자성어를 남긴다. 호연지기. 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 어쩌면 이것은 평화의 시대를 열망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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