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이들은 종종 그림으로 일기를 쓴다. 여행기도 그림으로 그리고 요리법을 메모할 때도 끼적끼적 그린다. 빼곡한 일정표를 일기로 삼는 이도 있다. 숫자 가득한 장부가 일기인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사진으로 일기를 쓰고 어떤 이는 시로 쓴다. 일기 쓰기가 지긋지긋한 숙제였던 시절이 지나가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고 위로하기 위해 저마다 제 방식으로 일기를 쓴다. 그러니 ‘연남천 풀다발’을 작가 전소영의 일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 책은 작가가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날마다 집 근처 홍제천을 산책하며 본 풀을 그리고 떠오르는 단상을 적어 책으로 묶은 것이다. ‘연남천’은 작가가 산책 다닌 홍제천에 따로 지어 붙인 이름이다.
표지는 하얀 바탕에 초록빛 풀꽃 다발 하나. 싱그럽다. 진초록 풀줄기 사이로 언제나 반가운 강아지풀과 앙증맞은 자줏빛 꽃송이, 까맣게 익은 열매가 고개를 내민다. 어쩐지 풀꽃 다발이 흐트러질 것 같아 조심스레 책을 집어 들면 가슬가슬한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기분 좋게 감긴다.
연남천 풀다발
전소영 지음
달그림 발행∙56쪽∙1만8,000원
표지를 젖히면 책이 활짝 열린다. 실로 엮어 맨 책 등이 맨살을 드러낸다. 보통 양장본과는 달리 앞 표지와 본문을 붙이지 않았다. 견고함은 덜할 터이나 책장이 온전히 열려 그림을 감상하기 편하다. 첫 장은 개천가 풍경. 물길 따라 풀이 무성하다. 고층빌딩 하나 물에 비쳐 흔들린다. 누군가 개천가를 걷는다. 그가 작가이리라 짐작해 본다. 날마다 이곳을 걸으며 본 것, 마음속에 떠오른 것으로 이 책을 채웠으리라.
작가는 우리가 흔히 잡초라 뭉뚱그려 부르는 길가의 풀,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무성히 자라는 풀을 본다. 내부순환로 아래 그늘진 개천가, 사람들이 눈길 주지 않는 풀을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떤 풀은 뾰쪽하고 어떤 풀은 둥글둥글하다. 둥근 풀은 뾰족한 풀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풀을 이해하는 순간, 깨달음과 위로가 함께 온다. “씨앗에 날개를 달아서 혹은 힘차게 멀리 터뜨리기도 하고, 밟히는 대로 납작하게 줄기를 뻗어 휘감아 기댄다.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
개천가 풍경 두 장면을 빼곤 모두 정갈한 풀 그림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풀씨,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벋어 나간 나팔꽃 줄기, 팽팽하게 각 잡힌 여름 바랭이, 활짝 편 초록 부채처럼 당당한 소리쟁이, 활기차게 뻗어가는 환삼덩굴, 대나무처럼 곧은 속새와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노랑코스모스, 눈 덮인 가지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아직 붉은 열매…. 군더더기 없이 대범하고 또 섬세하다. 세련된 구도로 연출한 풀 그림, 풀에게 배우며 스스로를 다잡는 진솔한 목소리가 마음을 흔든다.
탁한 물 흐르는 개천 옆 덤불 속에서 깨알 같은 꽃마리가 피고, 노란 애기똥풀, 연보라 벌개미취, 분홍 나팔꽃이 핀다. 달걀 프라이 같은 개망초가 핀다. 찬바람 부는 쓸쓸한 계절엔 문득 노란 산국화가 핀다. “모두에게 저마다의 계절”이 있다. 오염된 땅에 뿌리박고 잔바람에도 흔들리며 배기가스 속에서 꽃을 피운다. “고개를 숙일 줄은 알지만 부러지진 않는다.” “흔들리지만 질기게,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제 몫의 삶을 산다. 뽐내려 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책 갈피갈피 들풀 향기가 싱그럽다. 폭염에 밤잠을 설치고 책 속에서 산책을 한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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