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이 주관한 5개 외교장관회의가 개최되었다. 강대국 간 무역 갈등이 심화하고 있고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평화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회의가 열렸기 때문에 올해 회의는 과거 어느 때보다 특별한 주목을 끌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번 아세안 회의 계기에 주변 4강을 포함, 총 12개 국가와 양자 회담을 하였다. 공식 회담은 아니었으나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의 비공식 만남을 통해 짧지만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련의 노력은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만드는 데 유용한 국제 환경을 조성하고 지역의 공동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외교 활동으로 평가할 만하다. 다만 성과 이면에는 한국 외교가 해결해야 할 엄중한 과제도 자리하고 있다.
첫째, 이번 회의에서도 여전히 북한과 남중국해, 인도ㆍ태평양 전략 등 역내 안보 문제가 주된 논의 대상이었지만, 새로운 역내 질서 창출을 위한 다양한 논의도 눈에 띄었다. 각국은 예외 없이 규범에 기초한 질서를 내세우면서도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속내를 강하게 드러냈다. 역외 국가를 배제하고 동아시아 국가들만의 동아시아경제공동체(EAEC)를 실현하기 위한 협상을 하자고 제안한 나라도 있고, 인도ㆍ태평양 전략의 경제ㆍ안보 청사진을 제시한 국가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신남방정책의 비전을 제시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했고 아세안의 환영도 받았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고 지역 협력을 촉진할 수 있는 구상이면 협력을 모색해나갈 것이다. 역내 국가들의 지역 협력 구상에 대한 정교한 대응 방안을 수립하는 것은 중요한 한국 외교의 과제다.
둘째, 이번 회의는 판문점선언 이후 한반도 상황에 대한 지역 국가들 여론의 향배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국가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는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항구적 평화 구축 과정을 지지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내비친 국가도 없지 않았다.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이런 지역 국가들의 기대와 우려는 의장 성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북한은 문화적 유사성 등으로 인해 아세안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현재 외교적 고립 탈피를 위해 아세안 국가들과의 협력 모색을 적극 시도하고 있다. 비핵화 진전 추세에 맞추어 아세안이 지역 안보 구도에 북한을 계속 관여시켜 나가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부분에도 우리의 외교적 상상력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이번 회의를 통해 우리의 신남방정책에 대한 아세안의 확고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 정부는 내년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담을 신남방정책의 중간 성과를 점검하고 협력을 더욱 가속화하는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다. ‘사람이 먼저’ 라는 정부의 국정철학에 바탕을 두고 사람(people)과 평화(peace), 번영(prosperity)이라는 세 축이 고르게 진전되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과제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아세안 이주 여성들의 친정 나들이 기회를 만들어줌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잇고, 양측 중소기업 간 맞춤형 상담회를 개최해 ‘상생 번영’의 끈을 만드는 한편, 아세안 주도 협의체에 북한이 포용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구체적 ‘평화’ 실행 계획을 구상 중이다.
필자는 상대국의 마음을 열고 정서적 교감을 강조하는 우리 특유의 외교술이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나름 효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느꼈다. 케이팝(K-Pop)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이 대중문화의 매력과 혁신 선도적 경제 운용 등으로 아세안의 주의를 끌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번 아세안 주관 외교장관회의는 그간의 대(對)아세안 외교 성과와 더불어 양측 간 실질 협력 관계를 어떻게 확대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과제를 동시에 상기시켜준 중요한 회의였다.
윤순구 외교부 차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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