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가치논쟁’으로 보기엔 추상적
문재인 정부 겨냥한 프레임 전략 커
기회주의적 ‘대권행보’ 비판 경청해야
자유한국당 구원투수로 등장한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국가주의를 언급한 것은 뜻밖이다. 추상적이고 논쟁적인 주제를 꺼낸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국가주의를 자양분 삼아 몸집을 불려 온 당에서 나온 말이라 의아했다. 요즘 김 위원장은 국가주의 담론에 한껏 꽂혀 있다. 취임 초부터 ‘탈국가주의’를 강조하더니 최근에는 초중고 커피 판매금지와 먹방 규제에까지 국가주의를 들이댄다. 국가주의 논쟁을 자신의 ‘정치 브랜드’로 만들려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김 위원장의 국가주의 소환에는 ‘양수겸장’ 의도가 엿보인다. 우선 자유한국당 쇄신의 제일 목표로 제안한 ‘가치 혁신’의 신호탄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식 국가 개입에 동의하는 사람은 같이 갈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냉전반공주의와 국가주도 개발주의 노선의 폐기를 뜻한다. 나락에 떨어진 보수진영 재건을 위한 노선 투쟁은 당면하고도 절실한 과제다. 잘만 하면 2004년 총선 참패 후 박세일 전 의원이 제안했다 실패로 끝난 ‘보수의 사상전’을 펼칠 좋은 기회다.
하지만 강경 보수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구조에서 당내 기반이 전혀 없는 김 위원장의 말발이 얼마나 먹힐지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정작 칼을 빼 든 김 위원장의 행태부터가 분명치 않다. 박정희 체제 청산 주장에 당내 반발이 커지자 그는 “박정희 성장 모델을 뛰어넘자는 취지”라며 한발 물러섰다. 헌정유린 논란을 빚고 있는 계엄 문건에 대해서도 “위기관리 매뉴얼에 불과하다”며 당내 강경파 입장에 동조했다. 보수 가치 논쟁을 주도하려면 군을 정치적으로 오염시키고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태에 앞서 분노하는 게 정상이다. 이런 모호하고 애매한 자세로 치열한 노선 투쟁이 가능할지 의구심이 든다.
김 위원장의 국가주도 발언이 주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하고 있는 데서 외부용 전략이라는 게 더 두드러진다. 현 정부의 경제ㆍ복지 분야 개입을 국가주의로 규정하고 연일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을 보면 문재인 정부의 약한 고리를 집중 부각시켜 보수세력 결집을 꾀하려는 모양새다. ‘국가주의 대 자율주의’라는 프레임 형성이 정치공학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 중시, 지방분권, 평화 추구 등 자율성에 친화적인 문재인 정부를 국가주의로 비판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다. 빈곤과 실업, 일자리에 대한 시민의 불안을 덜어 주고 시장에서의 경제적 강자의 착취 제한은 보수ㆍ진보의 영역을 넘어 대다수 국가가 지향하는 바다. 김 위원장이 진정 국가주의를 비판하려면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의 국가주의에 대한 반성부터 선행돼야 한다. 민주화 이후 약화됐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킨 것이 바로 이들 정권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 사유화와 헌법 파괴, 부정부패야말로 시민을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국가주의의 표본이다.
보다 예사롭지 않은 것은 김 위원장이 국가주의 논쟁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비대위 체제 구축 후 김 위원장의 첫 대외 행보가 봉하마을 방문이었고 말끝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문재인을 박정희와 같은 국가주의 틀에 가두고 자신을 노무현의 ‘상생의 정치’ ‘자율정치’의 적자로 자리매김하려 한다는 해석이 나오는 게 무리는 아니다.
김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007년 정책특보 시절 대선 후보 출마 가능성을 시사해 친노 인사들과 소원해진 것은 잘 알려진 애기다. 유력 대권주자가 부재한 보수정당에서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야심을 갖는 것을 시비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거대 보수정당을 올바른 견제세력으로 환골탈태시킬 책임을 안고 있는 사람이 처음부터 정치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 위원장이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무너진 보수정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보수진영도 그 결과를 보고 김 위원장을 평가할 것이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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