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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용의자 CCTV 속 걸음걸이를 쫓았다

입력
2018.08.07 04:40
수정
2018.08.07 19:0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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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초반부터 난관

대로변 건물 앞 흉기 찔린 남성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 짐작

저녁이었지만 목격자 전혀 없고

CCTV엔 점처럼 보이는 용의자뿐

#결정적 특징 포착

주변 CCTV 120개 보고 또 보고

주민 등 6000명 탐문도 헛수고

CCTV 다시 돌려보다 “찾았다”

얼굴 안보여도 ‘안짱걸음’ 명백

#3단계 청부살해의 실체

현금 찾는 ‘안짱걸음’ 모습도 찾아

보행 분석해보니 동일인 추정 결론

신원 파악해 40대 조선족 체포

“아는 형으로부터 돈 받고…” 자백

#S건설 대표가 고소당하자 앙심

지인에 부탁해 조선족이 실행

교사자 건설사 대표는 무기징역

브로커, 살인범 징역 20년 확정

강서구 건축업자 청부살인사건. 강준구 기자
강서구 건축업자 청부살인사건. 강준구 기자

“저놈, 저놈 누가 저놈 좀 잡아줘요!”

2014년 3월 20일 오후 7시20분. 서울 강서구 방화동 대로변으로 한 남성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온 힘을 다한, 마지막까지 쥐어짠 듯, 목소리는 힘겨움으로 가득했다. 한 건물 4층 창문이 열렸다. 창문 밖으로 차모(당시 46)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건물 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한 중년 남성이 보였다.

흉기에 찔린 듯 남성의 목과 가슴, 배 이곳 저곳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혈을 하고 싶었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쓰러진 남성이 무언가를 말 하고 싶은 듯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내 들리지 않았다. 차씨 신고로 급히 달려온 119구급대에 의식을 잃은 채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남성은, 결국 숨을 거뒀다.

숨진 남성은 목격자 차씨가 살고 있는 건물에 함께 입주해 중소 건설업체를 운영하던 경모(당시 59)씨로 밝혀졌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강서경찰서 강상철 형사(현 강력6팀장)는 우선 ‘원한관계에 의한 살해’를 떠올렸다. “건설사 사장이 피해자고, 살해장소가 사무실 앞이라는 게 일단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원한관계가 아니라면 저 정도로 잔혹하게 흉기를 여러 번 쓸 일이 없었을 겁니다.“

물론 짐작이자 추정이었다. 증거는 그때까지 확보된 게 없었다. 현장에서 건진 단서라고 해봐야 건물 근처 공터에서 발견된 지문 없는 흉기,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오긴 했지만 얼굴은 물론이고 체형조차 쉽게 알아볼 수 없는 폐쇄회로(CC)TV 영상 정도가 전부였다. 사건 발생지점이 구식 다세대주택이 많은 낙후된 주택가고, 사건장소 인근이 마곡신도시 조성을 위해 아파트와 오피스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터라 추가로 CCTV 화면을 확보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럴 때일수록 수사 단서를 초기에 잡는 게 중요하고 봤습니다.” 류중국 당시 강력1팀장이 초반 총력전을 선언했다. “투 트랙(두 갈래)으로 수사해야겠습니다. 증거물 분석 꼼꼼히 하고, 피해자 주변인 탐문을 최대한 빨리, 많이 해 놓도록 합시다.” 전담수사팀이 50명 규모로 꾸려졌다. 팀원들은 현장 주변 CCTV를 정밀 분석하고 피해자 주변 인물과 사건장소 인근 거주자 대상 탐문수사를 진행해나갔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초반은 나쁘지 않았다. 사건 발생 다음날 피해자 회사에서 일하는 20대 사무직원으로부터 ‘어쩌면 중요 단서가 될지 모를’ 진술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최근 사장님과 다툰 사람이 있었어요.” 직원이 수원에 거주하는 건축가 양모씨를 콕 짚었다.

경씨는 당초 건축사 자격이 있는 양씨 명의를 빌려 건물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던 중 금전 문제로 다툼이 생겼고, 급기야 둘은 법정에서 얼굴을 붉혀야 했다. “양씨가 사건 당일에도 우리 사무실을 찾아오기로 했는데 오지도 않고, 연락도 닿지 않았어요.” 직원 말이 더해질 수록 양씨 행적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갔다.

경찰은 양씨를 곧바로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의 통신내역과 행적을 수집해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과 달랐다. 헛물이었다. 양씨가 진술한 사건 당일 행적은 경찰이 따로 조사한 통신수사ㆍCCTV를 통해 입증됐다. 그는 사건 당일 현장과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떨어진 수원 소재 회사와 집에 있었고, 휴대폰 등 통신기기 또한 그 지역에서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씨가 범인일 가능성은 0%였다.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사건 해결이 코앞’이라고 잔뜩 기대했던 수사팀원들은 허탈함과 막막함을 감추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사건 발생시각이 주민들 이동이 많았을 법한 저녁시간이었는데도 목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 CCTV에서도 용의자의 뚜렷한 생김새나 구체적인 이동경로가 잡히질 않았다. 그나마 손에 든 단서라면 CCTV상에선 ‘점’ 정도로만 보이는 범인 추정인물이 지하철 9호선 신방화역 방향으로 뛰어가는 모습 정도였다. “분명 현장 주변 CCTV 위치, 각도 등을 파악해 도주로를 치밀하게 구상했다는 것일 텐데. 그 뿐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지푸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사팀은 사건 현장 주변과 도주로 추정 길목에 설치된 CCTV 120개에 담긴 몇 달치 파일을 확보해 꼼꼼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방화동과 공항로 일대 637가구 약 1,600여명을 포함해 예상 도주로 거주자, 전출자까지 약 1,500세대 6,000명을 만나 조사했고, 피해자와 통화한 인물부터 금전거래자, 소송 상대 등 1,870여명을 탐문 수사했다. 전력을 다했지만 용의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경찰 수사력에 대한 질타가 외부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사팀 사기는 바닥을 쳤다. ‘강력사건 베테랑’ 류 팀장과 강 형사조차 조금씩 지쳐갔다. 팀원 중에는 화장실에 갔다 눈이 시뻘개져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억울했겠죠. 말은 안 해도 화장실에 가서 펑펑 울다 겨우 분을 가라앉히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죠.” 당시 신혼이던 형사 두 명은 몇 달 동안 단 두 번 퇴근했다. 또 다른 형사는 사건을 맡은 뒤 대학시절부터 7년 넘게 만나 온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류 팀장과 강 형사가 나서 “조금만 힘 내자, 힌트는 꼭 나타난다”고 후배들을 다독였지만 그들도 울고 싶긴 매한가지였다.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사건 발생 석 달, ‘꼭 나타난다’던 ‘힌트’가 등장했다. 확보한 CCTV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강 형사가 무릎을 쳤다. 사건 당일 17일 전부터 방화동과 공항도로 일대를 소형 자전거(미니벨로)를 타고 돌아다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CCTV 위치나 도주로를 파악하려는 듯한 모습이었어요. 게다가 며칠을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정작 사건 당일에는 현장 주변에 나타나질 않았어요.” 어쩌면 지푸라기가 될 수도 있다고 봤다. 아직까지 용의자로 특정할 만한 수상한 행적은 없었지만, 면밀히 추적해볼 필요가 있었다.

화면을 몇 백 번은 돌려봤다.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자 결정적인 ‘그만의’ 특징이 보였다. 흔히 ‘안짱걸음’이라 부르는 내족지보행. “그래, 이게 힌트다.” 사건 당일 방화동 일대 CCTV를 며칠에 걸쳐 다시 돌려보며 얼굴이나 체형이 아닌 ‘걸음걸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건 당일 신고시각으로부터 약 10분이 지난 시점, 현장에서 약 2.6㎞ 떨어진 지하철 5호선 발산역 부근 신발매장과 발산 119안전센터에 설치된 CCTV에서 비슷한 걸음걸이가 포착됐다. 사건 장소에서 곧장 택시를 탔다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그 놈’의 흔적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계절은 한 번 바뀌었고 7월이 왔다.

“신상부터 파악해보자.” 류 팀장이 지시를 내렸다. 사건 14일 전인 3월 6일, 공항동에서 안짱걸음을 한 남성이 현금인출기(ATM)와 공중전화가 함께 위치한 길가에서 약 2분35초간 멈춘 화면이 확보됐다. 수사팀은 그 시각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인출한 남성 신원파악에 나서기로 했다.

현금을 인출한 신용카드 주인은 중국 옌볜 출신의 한국계 중국인 김모(당시 48)씨였다. 수사팀이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와 법보행 전문가들에게 CCTV에서 나온 그의 것으로 보이는 안짱걸음 영상들을 보내 분석한 결과, 범행 당일 발산역 인근에 출현한 인물과 현금을 인출한 인물이 같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경찰은 즉시 김씨를 피의자로 전환하고, 통신과 금융거래 추적 등 추가 수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10월, 또 한 번 계절이 바뀌었다.

경찰이 마침내 경기 안산시 단원구 거주지 앞에서 김씨를 체포했다. 그간 통신기록에서는 김씨가 사건 당일까지 연고조차 없는 강서구 일대에서 휴대폰을 사용한 흔적이 나왔지만, 사건 직후부터 강서구는커녕 서울을 찾은 날조차 거의 없던 것으로 나왔다. 수사팀은 그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김씨는 경찰이 차곡차곡 쌓아온 수사 기록 앞에 손 쉽게 무너졌다. ‘발주자’로부터 3,100만원을 받고 경씨를 죽였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아는 형님이 (경씨를) ‘보내 버리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취업을 못 해 돈이 바닥 나 거절을 못했어요.” 청부살인이었다.

김씨를 조사하면서 경찰은 사건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사건은 두 단계로 이뤄졌다. 사건 꼭대기엔 경기 수원시에서 S건설을 운영하던 이모(당시 54)씨, 그 밑엔 이씨의 오랜 지인이자 지역 무술단체 이사를 맡고 있던 박모(당시 59)씨가 있었다. 둘은 1986년부터 30년 가까이 무술을 계기로 쌓아온 인연으로, 이씨의 재력과 박씨의 주먹을 잇는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주변에서는 ‘신의(信義)’라는 미명 하에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친밀함이라고 했다. 청부살해까지 협력한 악(惡)의 고리, 여기에 조선족 자치주 공수도협회장이던 김씨가 박씨로부터 ‘살해 민원’을 해결해 줄 적임자로 선택돼 합류한 것이다.

박씨는 당시 김씨가 상당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화(무술 등) 교류 목적으로 김씨가 발급받아 온 F4비자는 3년마다 갱신하면 영구 거주까지 가능하지만, 다른 직업은 가질 수 없었다. 단순 노무업종이라도 일을 하다 단속에 걸리면 강제추방을 당할 처지였다. 김씨는 함께 건너온 아내가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쳐 번 돈으로 근근이 생활해 오고 있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이씨가 원래 죽이고 싶었던 ‘제거 대상’은 경씨가 아니라 그의 부하직원 홍모(당시 40)씨였다. 이씨와 경씨가 각각 운영하던 S건설과 K건설은 2009년 12월부터 2014년까지 5년여간 총 11건의 민ㆍ형사 소송을 주고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이가 바로 K건설 법률대리인 홍씨였다. 7개 송사 가운데 핵심이던 5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진 이씨가 홍씨에게 “(5억원 가운데) 2억원을 줄 테니 더 이상 소송을 진행하지 말라.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지만 홍씨는 2013년 7월 또 다시 사기 등 혐의로 이씨를 고소했고, 이때 이씨가 폭발을 한 것이다. “다만 홍씨가 2014년 초 회사를 그만 두면서 표적을 경씨로 바꾼 겁니다. 회사를 떠난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이씨와 박씨는 “(경씨를) 죽이라고 한 적은 없다”며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 실제 이씨는 1심에서 “살인을 청부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재판부 판단에 ‘상해교사’ 혐의만 인정돼 징역 7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상급심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1심 판단대로라면 박씨가 김씨에게 ‘경씨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는 건데, 박씨에겐 경씨를 살해할 만한 합당한 사유가 보이지 않는다”며 원심 판단을 뒤집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016년 11월 대법원은 2심 판단대로 이씨에게 무기징역, 브로커 박씨와 살인범 김씨에게 각각 징역 20년을 확정 판결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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