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무너뜨린 신뢰 회복하려면
행정 비대화 막고 재판 질 높여야
진상규명과 합당한 처벌이 선결과제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 들어서면 대법정 출입문 위 벽감(壁龕)에 자리한 정의의 여신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신화 속 정의의 여신 ‘디케’를 “한국적 느낌으로 재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특이한 건 전래동화에 나올 법한 선녀옷 차림만이 아니다. 서양의 디케가 대부분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한 손에 저울, 한 손에 칼을 든 채 역동적 자세로 서 있는 반면, 이 여신은 두 눈을 뜬 채 양손에 저울과 법전을 들고 곱게 앉아 있다. 불편부당(가린 두 눈)과 정의(칼)의 상징을 내던진 이 한국적 변용은, 섬뜩하게도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고 말았다. 고 노회찬 의원은 생전에 한 방송에서 “눈을 안 가리고 있다는 건 ‘니 누꼬? 느그 아버지 뭐 하노? 그리고 청와대는 뭐라 카드노?’ 그러고 있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초 법원행정처의 ‘판사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촉발된 사태는 사법 수뇌부의 ‘재판 거래’ 의혹으로 번졌고 이제 ‘사법 쿠데타’란 오명까지 썼다. 너무 나갔다고? 천만에.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결과다. 특조단은 보고서에 “판결을 거래나 흥정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흔적들이 발견되었”고,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에 부여한 ‘재판 독립’, ‘법관 독립’이라는 헌법적 장치를 사법부 자신이 부인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그 존재 근거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명시했다.
법원 안팎의 아우성에 밀려 찔끔찔끔 공개한 문건들에 나타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행보는 온갖 수단으로 자신의 이익만 꾀하는 모리배 행태와 다를 게 없다. 누군가의 절박한 삶과 목숨이 걸린 재판결과를 상고법원 관철을 위한 청와대 로비용으로 활용하고, 삼권분립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한 판사 인사권 거래, 청와대 비협조로 상고법원 추진이 좌절될 것에 대비한 압박 플랜까지 기획했다. 이견을 차단해 대외 협상력을 높인다며 ‘판사동일체 원칙’이라 할 일사불란한 조직 관리에 골몰했다. 이에 비하면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한 국회 로비나 제 편이라 믿는 특정 언론에 거액 협찬을 미끼로 한 기사 청탁은 새 발의 피로 여겨질 지경이다.
불행히도 상당수 법관들은 국민이 느끼는 충격과 분노, 절망을 공감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자체 진상규명 실패의 귀결인 검찰 수사를 부당한 침해로 여기기도 한다. 1일 퇴임한 대법관 3명은 퇴임사에서 ‘사법의 권위’나 ‘사법권 독립’ 훼손을 깊이 우려했지만 그것이 왜,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해선 함구했다. 진심 어린 반성도 없었다.
미국의 연방검사 출신 변호사 켄들 코피는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에서 여론의 작용과 그에 대한 대응을 살펴야 하는 이유를 “변호사와 소송당사자들, 그리고 언론이 각자 무자비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쫓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목도한 현실은 오히려 “사법부가 더 무자비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쫓는 세계”였다. 행정처 문건은 상고를 고집하는 국민을 “이기적 존재들”로 폄하했지만, 신체의 자유나 생명, 재산이 걸린 소송당사자의 이기심은 탓할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공정한 심판자여야 할 사법부가 한낱 ‘이기적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어설픈 상고법원 추진 실패 이후 이유도 적시하지 않는 ‘심리불속행 기각’ 늘리기를 대책이라고 내놓은 그 무지한 이기심 말이다.
헌법이 명하고 국민이 기대한 사법부는 이미 죽었다. 외력에 의한 사망이 아니다. 스스로 땅을 파고 몸을 묻었다. 살 길은 하나다. 스스로 무너뜨린 신뢰와 권위를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 제왕적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사법행정의 관료화ㆍ비대화를 해소하고, 소송당사자들이 기꺼이 승복할 수 있도록 사실심 재판의 질을 높이는 데 역량을 쏟아야 한다. 에둘러 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려면 이 어처구니없는 사법 사망 사태의 진상부터 낱낱이 밝혀 응분의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208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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