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도서관, 미술관은 텅 비어 있다. 전시가 시작될 기미도, 공연이 끝난 후의 열기도 감지되지 않는다. 칸디다 회퍼의 사진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든 공간에 사람이 사라질 때 그 공간은 무슨 말을 하는가, 회퍼의 사진은 이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현대 사진의 지평을 넓혀온 세계적인 작가 칸디다 회퍼가 한국을 찾았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네 번째 개인전 ‘Spaces of Enlightenment’ 참석을 위해서다. 유형학적 사진의 모태가 되는 ‘베허 학파’ 1세대 작가 중 한 명인 회퍼는 공적인 건축물의 내부 공간을 담은 사진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 사진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 전시는 회퍼의 작품 중 1990년대 말부터 근래까지 촬영된 ‘공연장’ ‘도서관’ ‘미술관’ 등 특정기관의 공간에 주목한다. 전시가 시작하는 26일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사람을 배제하고 사진을 찍은 이유에 대해 “사람이 없을 때 공간을 더 풍부하게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제가 처음부터 공간을 다룬 건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어떻게 공간을 구성했는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인간이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제겐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전시의 주제인 ‘Spaces of Enlightenment’는 깨달음, 깨우침, 계몽의 공간이라는 의미다. 중세 수도원 내 바로크 양식의 도서관, 프랑스국립도서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내 복도에 놓인 작은 서가, 빌라 보르헤스, 에르미타주미술관 등은 모두 인간의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평소 인위적인 설정 없이 최대한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작가는 “공간이 마음을 건드리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셔터를 누른다”며 “가장 중요한 건 ‘적당하다’고 느낄 수 있는 크기와 공간감”이라고 말했다.
18세기 이전 특정 계층만 향유하던 사적 공간들이 점차 대중에 그 문을 개방하는 순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국제갤러리는 “특권 계층을 위한 곳에서 민주화된 문화의 장소로 바뀐 이런 공간들은 무수히 많은 예술가, 청중과 교류함으로써 깨달음의 공간으로, 다시 창작의 위대한 공간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한다”면서 “회퍼는 이 모든 것이 축적된 공간들을 그만의 긴 기다림과 호흡으로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8월 26일까지.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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