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자전거’ 목일신 시인이 부친
이사도라 던컨 자서전 접한 후
공연예술의 꿈 갖게 돼
최근 ‘칼리의 프랑스 학교…’ 출간
중학교 2학년인 딸을 관찰하며
佛 공교육의 단면 보여주고 싶어
영혼이 나와 닮은 빌헬름 라이히
그의 책들도 반복해서 읽고 있어
이 미친 폭염 속에, 그것도 하필 낮 3시에 우리는 서울 세종대로의 한 빌딩 옥상에서 어색한 듯 엷은 미소를 나누며 나란히 앉아 말을 섞고 있었다. 너무 더우니까 어느 순간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는 느낌마저 들던데요. 맞다, 그런 갑갑함이구나. 간밤 내가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 시원하기 그지없는 지하 2층의 한 장례식장에서 조문하며 느꼈던 답답함이 그래서일 수도 있겠구나. 뭔가의 슬픔을 한데 겪은 사이 같으니까 와락, 하는 친근함이 쉬이 끼쳐오는 듯도 했다. 그녀와 나는 본격적인 책으로의 수다에 앞서 작정한 것도 아닌데 같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둘 사이에 앉혔다. 만나면 반갑다고 책 권하던 사람, 노회찬. 헤어질 때 아쉬우면 책 보라던 사람, 노회찬. 어디로 갔을까. 구두만 남겨놓고 그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있다 없으니까 영 간 거겠지 싶으면서도 나는 초면의 우리 둘을 어색하지 않게 계속 이어주고 있는 그의 존재감을 연신 재확인하고 있었다.
김=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를 한 달 전쯤 내셨어요. 딸 이름이 그러니까 칼리인 거지요? 중학교 2학년이라면서요. 다 읽고 저는 ‘관찰’이라는 단어를 소회로 써두었지 뭐예요.”
목= “맞아요, 이 책은 칼리에 대한 제 관찰기라 할 수 있어요. 학부모들의 행동이라든지 아이들 사이의 대화라든지 이런 걸 그대로 옮겨 적음으로 프랑스 공교육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려 했던 것 같아요.”
김= “칼리는 무얼 가장 잘하나요?”
목= “불어 작문이요. 만점에 점수를 얹어 받을 만큼 아주 잘한대요.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칼리는 자기 주관이 아주 분명한 글을 쓴대요. 제가 칭찬이랍시고 이런 애를 누가 키웠을까, 하면 칼리가 그래요. 나는 내가 키웠어, 라고요. 칼리에게 네 인생에서 뭐가 가장 중요하니? 하면 나, 나의 삶, 그렇게 답해요.”
김= “아버님이 시인이셨잖아요. 목일신 선생님이요. 그 유명한 동요 ‘자전거’가 아버님의 동시였다지요.”
목= “정작 저는 아빠가 시 쓰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알려진 건 다 아빠가 어렸을 때 쓰신 거예요. 그때는 신문에 어린이들의 시를 싣는 지면이 있었대요. 아빠가 시를 쓰면 할아버지가 신문에 보내시고 당선이 되면 게재가 되고 그랬대요. ‘자전거’는 아빠가 열한 살 때 쓴 동시인데요, 당시 중학교 다니던 작곡가 김대현 선생님이 전차 안에서 그거 읽으시고 즉석으로 곡을 붙이셨대요. 아빠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한 달간 감방 생활을 하시기도 했는데요, 작은 몽당연필 숨겨 가지고 하루에 한 장씩 배급되는 휴지 조각 위에 글을 쓰기도 했대요.”
김= “아버지의 영향이 컸겠는걸요.”
목= “아빠가 배화여고 국어교사였는데 제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뭔지 아세요? 배화여고 교지 ‘배화’였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교지에 실린 언니들의 시라든가 독후감이라든가 에세이라든가 읽으면서 10년쯤 지나면 나도 이런 세계에 도달하겠구나, 언니들의 속살과 고뇌를 많이 훔쳐봤던 것 같아요.”
김=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배화’의 뿌리가 닿아서기도 했겠네요.”
목= “아무래도요. 그러다 어느 날 석영중 교수님으로부터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와 마야코프스키의 시를 배웠어요. 마음이 정말 촉촉해지는 거예요. 예세닌의 생애를 파다 보니 그와 연애를 했던 이사도라 던컨이 나와요. 수업 마치고 학교 후문에 있는 서점에 갔더니 이데아 총서에서 나온 이사도라 던컨의 자서전이 있어요. 껴안았죠. 그러면서 공연예술의 꿈이 제게 스몄던 것 같아요.”
김= “관광공사, 동숭아트센터, 국립발레단, 민주노동당, 네 군데에서 일을 하셨더라고요.”
목= “대학 4학년 때 일단 치른 관광공사 시험은 일종의 타협이었어요. 4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도 내 진로에 대한 방황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민예총에서 하는 문예아카데미 강의도 숱하게 듣고 집에 가는 길에 매일같이 영풍문고 들러 책을 읽곤 했어요. 동숭동은요, 내 인생에서 여긴 나의 숲이야, 라고 생각하는 곳 중 하나에요. 연극으로 먹고살겠다는 게 아니고 연극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매혹이 되었던 시간이었지요. 그러다 문득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결국엔 연극이라는 장르를 바라보는 국가적인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거기에 대한 답을 갖고 오겠어, 하고 문화정책을 공부하고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 거지요.”
김= “프랑스에 가보니 확실히 우리와는 다른 분명한 정책이 있던가요?”
목= “그럼요. ‘연극 이퀄 공공서비스’인 거예요. 자기 돈을 처박아서 공연을 만드는 사람은 없어요. 게다가 직업적 특성상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예술가들은 1969년부터 실업급여를 받아왔어요. 제가 민주노동당에 있을 때 그걸 발의했는데요, 그게 지금 문재인 정부의 100대 과제 안에 들어가 있어요. 당은 사라져도 정책은 사라지지 않는 거예요.”
김= “간만에 한국에 오셨는데 참… 힘든 나날입니다.”
목=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난 일… 제 남편 희완에게도 말해줬거든요. 충격을 크게 받더라고요. 식사를 하면서 아주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서로에게 반했던 것 같아요. 어떤 분야에서든 툭 치면 그는 좌르르 나와요. 파리에서 누군가 그에게 질문을 했어요. 예술가는 태생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거냐고요. 그랬더니 양양이라든지 울진이라든지 예천이라든지 비행기 하나 안 뜨는 데다 공항을 만들고 또 만든다, 그 활주로 다 뭐할 거냐, 고추 말리는 데 다 쓸 거냐, 그럼에도 예술가는 가난해도 된다고 여전히 말하고 있다, 예술이 건강하게 사회에서 싹트게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역할이다, 의무다… 그러면서 이란 영화를 예로 들더라고요. 호메이니가 집권한 뒤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미국 영화 수입 금지 조치 내렸다, 그러나 이란 영화에 대한 국가가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결과 세계 영화사에서 이란만의 독보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희완도 그렇지만 그 역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연상케 하는 사람이었어요. 직업이 정치가였을 뿐이지 자기 신념이 분명한, 이 사람은 전인이에요. 치우침이 없어요. 장르 구분이 없는 거예요. 아깝죠. 원통하고요.”
김= “그럼에도 한국을 사랑하시는 거… 맞죠?”
목= “그럼요. 애정이 너무너무 뜨겁죠. 예컨대 한국 교육에 대한 들끓는 마음이 없었으면 제가 이 책을 썼겠어요? 다만 저는 이 책을 쓰면서 교육에 있어 이러한 방향도 있음에 사람들이 영감을 받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저는 프랑스에 살지만 사실 그곳에서 한국을 사는 거예요. 한국의 문제에 대해서 갖는 애정만큼 프랑스에 날을 세우거나 그러지는 않거든요. 다만 프랑스에도 문제가 많아서요, 집회가 있으면 나가요. 그들은 각자가 튀어나와 있고, 그들은 자기만의 슬로건이 있고, 그게 분명 서로에게 영감을 준다 싶어요. 각자가 들고 나온 수백 수천의 전단들, 그 어휘의 다양성, 생각의 차이들, 그걸 보는 게 진짜 공부 같아요.”
김= “말마따나 프랑스 거리의 책이군요. 작가님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은요?”
목= “크리스티안 노스럽의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와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란 책이에요.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는 오래 전에 사뒀는데 손이 안 가다가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책 같고요,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는 ‘페친’(페이스북 친구)께서 선물로 주셨는데요, 왜 프랑스에는 바칼로레아가 있잖아요. 거슬러 가보면 우리에게도 있었거든요. 과거 시험에서 인재를 그거 하나로 알아봤잖아요. 이 책은 그때의 질문과 답변을 모아놓은 거예요. 그리고 참 여전히 반복해서 읽고 있는, 유례없이 나와 영혼이 닮았다 싶은 한 사람이 있어요. 빌헬름 라이히의 책들이요!”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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