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5년 앞둔 고참 리스트 작성
연봉협상까지 대신 하며 압박
일정기간 지나면 취업자 교체도
정재찬 김학현 신영선 영장
공정거래위원회가 ‘을’ 입장인 대기업들 상대로 퇴직자의 취업을 조직적으로 알선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 구상엽)는 26일 업무방해 등 혐의로 정재찬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학현ㆍ신영선 전 부위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한국일보 취재 결과, 공정위는 2009년부터 ‘퇴직자 관리방안’이라는 문건을 작성해 실행에 옮겼다. 문건에는 퇴직을 4~5년 앞둔 직원들을 ‘고참’ ‘고령’ 등으로 분류하고, 이들이 퇴직 후 재취업할 기업들 리스트를 작성한 뒤 ‘맞춤형 취업’을 알선해 온 정황이 적혀있다.
공정위 측은 재취업 대상 민간 기업을 ‘유관기관’이라고 지칭하며 이들 회사에 압박을 넣어 사실상 취업을 강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 측은 심지어 재취업 대상자들의 연봉 협상까지 대신 해주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들을 내보낸 뒤 다시 공정위 측이 지명하는 퇴직자를 취업시키도록 했다.
검찰 조사에서 해당 기업 관계자들은 “뽑지 않아도 될 인력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채용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 적체로 인한 공정위 유휴인력 문제를 기업의 돈으로 해결해왔던 셈이다. 검찰은 공정위 ‘갑(甲)질’을 이기지 못해, 현대ㆍ기아자동차, 현대백화점, 신세계 등 10여곳의 대기업이 10여명을 채용해 수년간 총 70억원에 육박하는 인건비를 지불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검찰은 김 전 부위원장 혐의에 공직자윤리법 위반, 뇌물수수 등을 추가 적용했다. ‘4급 이상 공직자는 퇴직 전 5년간 일했던 기관ㆍ부서 업무와 관련 있는 곳에 퇴직일로부터 3년간 재취업할 수 없다’고 규정한 공직자윤리법을 어기고 2013년 한국공정경쟁연합회 회장으로 옮기면서, 취업 심사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혐의다. 대기업 계열사에 자신의 자녀를 취업시키도록 청탁한 혐의도 있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정부기관이 관리감독을 받는 기업들을 상대로 위세를 이용해 조직적으로 채용을 강요한 사례는 처음 본다”라며 “공정위의 체질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