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딕 라잇시
#첫 조직적 시민 불복종운동 ‘Sip-In’
‘게이 출입금지’ 경찰 함정단속에
“우리는 선량한 시민” 내세우며술집 등 차별받던 현실에 사과 받아
# “게이 인권 모르던 켄터키 촌놈”
흑인 인권운동 하던 진보적 아버지 성장해 뉴욕 정착$ ‘티파니’ 판매도인권 매체 기고하며 저널리스트 꿈
#‘스톤월 항쟁’ 기초를 다지다
경찰의 무차별적 게이 연행에 분노사태 진정 요청에 “그러지 않을 것” “그날 이후 모두가 게이” 자부심 보여
1966년 4월 22일자 뉴욕타임스는 대통령 존슨이 21일 베트남전 전장의 영웅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치하한 소식을 1면 머릿기사로 실었다. 휴스턴의대 외과의 마이클 드베이키(Michael Debakey)가 65세 광부에게 인공심장을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는 뉴스, 8주 파업을 이어가던 ‘콜게이트’사 노사가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는 뉴스, 프랑스 의회가 알제리 내전 당시 반정부활동으로 기소된 1,675명의 사면을 의결했다는 소식 등이 그날 주요 지면을 채웠다.
세 명의 남성 동성애자가 뉴욕의 한 술집에 들어가 바텐더에게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밝히며 술을 주문했다가 거절 당한 사연은 신문 43면(총 84면)의 1단 기사로 실렸다. 기사 제목은 “변태 3명(3 deviates) 술집서 퇴짜맞다”였다.
그들이 저 해프닝을 작정하고 벌인 까닭은, 우선 동성애자가 술집에서 차별 당하는 현실과 경찰의 함정단속을 성토하기 위해서였지만, 바탕에는 그들도 마땅히 누려야 할 연방헌법 1조의 권리(회합의 자유)에 대한 주류관리국(SLA, State Liquor Authority)의 입장을 따져 묻기 위해서였다. 사복 경찰관들이 술집을 돌며 동성애자로 보이는 이들에게 추파를 던진 뒤 거기 동조하면 이른바 ‘소도미 법(Sodomy Law, 변태 음란행위 처벌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일이 생기면 SLA는 그 술집의 주류판매 면허를 정지ㆍ취소하곤 해서 술집 주인들은 게이 손님을 기피하거나 아예 출입을 못하게 했다. 그나마 게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대부분 마피아가 운영하거나 무허가 술집이어서, 경찰에 정기적으로 뒷돈을 상납하며 단속 위험을 더는 대신 물 탄 술과 바가지 술값으로 이익을 챙겼다. 그나마도 그런 곳들이 게이들의 비교적 안전한 해방구였다. 물론 거기서도 그들은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진 못했다.
65년 말 30세의 딕 라잇시(Dick Leitsch)가 선구적 게이 인권운동단체 ‘매터신 협회(Mattachine Society)’의 뉴욕시 지부장이 되면서 내건 공약이 저 경찰 함정단속 근절이었고, 첫 사업이 남부 흑인들의 ‘싯인(Seat-Inㆍ흑백분리거부운동)’에 빗대 ‘십인(Sip- In)’이라 부른 저 해프닝이었다.
라잇시는 협회 부지부장 크레이그 로드웰(Craig Rodwell, 당시 25세)과 회원 존 티먼스(John Timmons, 당시 21세)와 함께 66년 4월 21일 정오 무렵 술집 순례를 시작했다. 그는 앞서 뉴욕타임스와 ‘빌리지 보이스’ 등 언론사 네 곳에 자신들의 계획을 알렸다. 첫 타깃은 맨해튼 이스트빌리지 3번가의 ‘우크라이니언-아메리칸 빌리지 홀’이었다. 출입구에 아예 ‘게이 출입금지(If you are gay, please stay away)’ 표지판을 달고 영업하던 그곳은, 하지만 라잇시 일행이 도착하기 직전 영업을 멈추고 문을 닫아걸었다. 먼저 도착했던 뉴욕타임스 기자가 업주에게 ‘계획’을 누설한 탓이었다. 길 건너 ‘돔 Dom’이란 클럽 역시 문을 닫아 시도조차 못했다. 일행은 8번가 술집 ‘하워드 존슨스(Howard Johnson’s)에서 첫 도전에 성공했다. 자리를 잡은 라잇시는 웨이트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동성애자다. 우리는 선량한(orderly) 시민이고, 좋은 매너(orderly)를 유지할 생각이니, 우리에게 술을 달라.” 그들이 ‘orderly(규칙을 따르는)’를 강조한 이유는 경찰들이 게이를 단속하며 입에 달고 다니던 게 ‘disorderly(규칙ㆍ질서에서 벗어난)’였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웨이트리스가 매니저를 불렀고, 매니저는 “왜 저분들에게 술을 못 판단 말이야? 내 눈엔 완벽한 신사들인데”라고 반문하며 “나는 개인의 성생활을 물을 권리가 정부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선량하게’ 술을 마시고 나왔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우릴 밀어내지 않으면 어떡하지?”(라잇시) 세 번째로 도전한 마피아 술집 ‘와이키키’에서도 ‘작전’은 실패했다. 매니저는 웨이트리스에게 “저 분들이 동성애자란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라며 오히려 버번 위스키 석 잔을 서비스로 제공하게 했다. “나 이제 좀 취하는데,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티먼스)
10번가 ‘줄리어스 Julius’는 따분하고 인기 없는 술집이어서 ‘언론플레이’ 용으로는 덜 매력적이었고, 소심한 게이들이 아지트처럼 여겨 ‘클로짓 퀸 바 Closet Queen Bar)’라 불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불과 열흘 전 게이 한 명이 함정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 위기에 몰려있던 때였다. 줄리어스의 바텐더는 그들이 게이라고 밝히자마자 나눠줬던 술잔을 손으로 덮으며 나가달라고 말했고, ‘빌리지 보이스’ 사진기자(Fred. McDarrah)가 그 장면을 촬영했다. 당시 라잇시 일행은 말쑥한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누가 보더라도 ‘orderly’한 차림이었다.
그 사진과 함께 기사가 보도됐고, 매터신 협회는 SLA의 공식 입장을 요구했다. 며칠 뒤 SLA 도널드 호스테트(Donald S. Hostetter) 국장은 “게이들에게 술을 팔면 안 된다는 SLA 규정은 없고, 그런 일로 업주들을 위협한 적도 없다. 그건 전적으로 바텐더 개인의 판단이다”라고 해명했다.
스톤월 항쟁 이전, 게이들의 첫 조직적 시민 불복종운동이라 불리는 ‘줄리어스의 Sip-In’이 그렇게 성공했다. 유사한 일들이 동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됐고, 매터신 협회는 게이들에게 술 판매를 거부한 업주들을 고소했다. 67년 뉴저지 주 대법원은 매터신의 손을 들어주며 판결문에 이렇게 밝혔다. “우리 문화 안에서 동성애는 사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범죄자이거나 위법행위자인 것은 아니다.”(Washington Post) 그들은 이후 조금은 더 당당하게 술집을 출입하게 됐고, 무엇보다 공공기관의 사실상의 사과를 받아냄으로써 다친 자존감을 얼마간 회복했다.
리처드 조셉 라잇시(Richard Joseph Leitsch)는 1935년 5월 11일 켄터키 주 루이빌의 담배 도매업자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아버지가 ‘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루이빌 지부 첫 백인 회원이었을 만큼 진보적이었다고 한다.(WP) 라잇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자 아이들에게 끌렸고, 고교 재학 중 몇 차례 성 경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그가 부모에게 성 정체성을 밝혔는지는 설이 엇갈리는데, 뉴욕타임스와 달리 워싱턴포스트는 조카의 말을 인용해 커밍아웃은 하지 않았다고 썼다.) 그는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던 독서광이었고, 루이빌 벨러민대에 진학해서는 연극연출을 전공했으나 졸업은 하지 않았다. 라잇시가 고향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것은 고교를 졸업(53년)하고도 6년 뒤인 59년이었다. 어려서부터 방송 등을 보고 들으며 대도시의 삶을 동경했다지만, 당시 미국 남부 관습과 그의 삶이 동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난 4월 ‘뉴요커’ 인터뷰에서 그는 “켄터키에서는 다들 아이를 낳고, 교회에 가고, 농구를 했다. 나는 그것들 모두 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거기 살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갓 뉴요커가 됐을 무렵의 자신을 그는 “게이 인권에 대해 전혀 모르던 켄터키 출신 ‘촌놈(hick)”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는 게이 인권운동이란 말조차 대중화하지 않아, 극소수 활동가들도 ‘동성애자 운동 homophile movement’란 말을 쓰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아니 늙어서도- 라잇시의 외모는 배우를 해도 될 만큼 매력적이었다. 말투에 남부 사투리가 좀 섞이긴 했겠지만, 보석점 ‘티파니’의 판매사원을 한 적도 있었다니, 바텐더나 웨이터 같은 일자리를 얻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두던 일은 글쓰기, 특히 저널리스트가 되는 거였다. 그는 프리랜스 기자로, 주로 인권 관련 매체에 글을 썼다. 갓 데뷔한 무명 가수 베트 미들러(Bette Midler)를 최초로 인터뷰해 71년 10월 동성애자 매체 ‘Gay’에 기사를 쓴 게 그였다.
매터신 협회는,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태양이 암석이 아닌 플라스마 항성이며 구성성분이 어떠하다는 걸 밝혀낸 여성 천문학자 세실리아 페인(Cecilia Payne, 1900~1979)의 하버드대 제자인 프랭크 카메니(Frank Kameny, 1925~2011)가 1950년 설립한 선구적 게이 인권운동단체로 50~60년대 흑인 시민권 운동과 동조하며 게이의 법적ㆍ사회적 차별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던 중세 이탈리아 왕실의 어릿광대(Mettaccino)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동성애자란 이유로 직장서 쫓겨나 천문학자의 이력이 단절된 카메니처럼, 라잇시 역시 협회 활동 초기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을 협회 안팎에 공개한 게이였다.
그는 연인이던 크레이그 로드웰의 소개로 ‘매터신 협회’에 가입했고, 65년 지부장 선거에 부회장으로 등 떠밀려 출마해 당선했고, 그 해 말 회장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얼떨결에 회장이 됐다. 그는 협회를 대표해 실명으로 이런저런 글을 썼고, 강연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65년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하원의원 출신 존 린제이(John Lindsay, 1921~2000)의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다. 린제이는 시민권운동에 적극 가담하던 진보 정치인(71년 민주당으로 당적 변경)으로, 방송활동 등을 통해 라잇시와 안면을 튼 사이였다. 이듬해 라잇시가 ‘Sip-In’을 감행한 데는, 새 시장 린제이에 대한 신뢰도 작용했을 것이다. 뉴욕시는 저 일 직후 경찰 함정단속을 공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경찰 비리 등에 대한 뉴욕포스트 등의 후속 특집 보도와 린제이의 친인권 행정 등이 맞물려 60년대 중반 미국 동부 대도시 게이들은 얼마간 기를 펼 수 있었다. 훗날 라잇시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그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시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69년 6월의 ‘스톤월 항쟁(Stonewall Uprising)’은 저 변화의 성과였다. 스톤월 항쟁이란, 경찰이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술집 ‘스톤월’에 들이닥쳐 점원과 동성애자 13명을 연행한 데 분노, 뉴욕의 게이들과 일부 시민들이 6일 동안 전투적으로 맞서며 이른바 ‘게이 파워(Gay Power)’를 과시한, 게이 인권운동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물론 게이들의 각성과 전투력은 ‘Sip-in’ 이후 변곡점을 넘어섰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톤월 항쟁은 “우리도 당신들(백인 이성애자들)과 다를 바 없는 선량한(orderly) 시민”임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매터신 협회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항쟁 직후 출범함 ‘게이해방전선(GLF)’ 등은 소극적인 동화주의 노선의 협회를 대놓고 비판하고 조롱했다. 협회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이후 영향력을 잃어갔고, 라잇시도 그 해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항쟁 당시 린제이 시장이 라잇시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를 진정시켜 달라고 청했는데, 라잇시는 “내가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거다. 바로 내가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오래 전부터 애써온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항쟁 현장을 취재, 게이 기자로선 최초로 매터신 협회 소식지에 ‘사상 최초의 게이 항쟁’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고, 그 기사는 69년 9월 LGBT 매체 ‘Advocate’에 다시 실렸다.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를 섞어가며 대치의 긴장, 참가자들의 분노, 감격의 흥분을 전한 그 기사의 요지는, 하지만 그가 시장에게 한 말과는 약간 뉘앙스가 달랐다. “평소 시시(Sissies)나 스위시(Swishes, 여자애 같은 사내)라 불리며 조롱 받던 이들이 보여준 용기는 무척 놀라웠다. 그들은 용맹스럽고 대담하게 부상당하거나 연행될 뻔한 많은 이들을 구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빛나는 유머 감각을 발휘하며 사태가 지나치게 과격해지거나 눈살 찌푸릴 지경(too nasty)으로 번지지 않도록 자제했다.”(advocate.com)
2008년 npr 인터뷰에서 라잇시는 상징적 의미에서 게이들이 술집을 갖게 된 것으로 자신(매터신 협회)들의 목표는 이룬 셈이며 스톤월 항쟁과 협회는 관련이 없다고, “우리는 게이들이 일어나 저항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2016년 인터뷰에서 “스톤월 이전의 게이는 나 혼자 뿐이었는데, 그날 이후 모두가 게이가 됐더라”고 한 말은, 비아냥이 아니라 보람과 자부를 담아 한 말이었다.
그들의 성지 ‘줄리어스’는 ‘Sip-In’ 50주년이던 2016년 4월 국가등록사적지로 지정됐고, 뮤지컬 ‘헤드윅’의 토니상 배우 존 카메론 미첼(John Cameron Mitchell)이 주선하는 매터신 댄스파티가 98년부터 매달 한 차례씩 열린다. 라잇시 등 역전의 게이들이 거기서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라잇시는 17년간 함께 산 파트너와 1998년 사별한 뒤 혼자 지냈다. 그는 지난 2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4월 자신이 모아둔 게이 인권운동 관련 자료 일체를 뉴욕공공도서관에 기증했다. 60년대 그가 직접 만들어 배포한 동성애자 속어집, 경찰 단속 대응요령 같은 자료도 거기 포함됐다. 뉴요커 기자에게 자료들의 사연을 들려주던 끝에 그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마약중독자에게 샀다는 멋진 촛대 하나를 보여주며 “길 건너편 장례식장에 있던 물건일 것”이라고, “이제 이것도 돌려줘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6월 22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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