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은 ‘Sexual harassment’ 번역어다. Sexual ‘harassment’를 성‘희롱’이라 옮긴 건 나름대로 의도가 있다. 가볍게 건네는, 조금 짓궂은 농담조차도 ‘Harassment’에 해당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욕한 것도, 때린 것도 아닌데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느냐”, “그 정도 농담은 해도 되는 사이인 줄 알았다” 같은, 변함없이 반복되는 남성들의 변명, 혹은 항변을 떠올려보면 된다. ‘희롱’이란 번역어를 고른 것은 ‘그 정도에 불과한 언행이라 해도 충분히 죄가 되고도 남는다’는, 일종의 계도적 의미가 담긴 선택이다.
▦ 여성계에선 불만도 내비친다. ‘희롱’이란 말의 어감 때문에 성희롱이 희화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Judicial harassment’를 덧대어봐도 그렇다. 외신에서 이 단어를 썼을 때 이를 ‘법희롱’이라 옮길 국제부 기자는 없다. 독재국가에 관한 뉴스에서 이 표현이 나오면 어김없이 ‘법적 괴롭힘’ 혹은 ‘사법 탄압’이라 쓴다. 이젠 시대도 바뀌었으니 Sexual harassment를 ‘성적 괴롭힘’, Judicial harassment를 ‘법희롱’이라 바꿔보면 어떨까. 계도되어야 할 것은 법 만능주의인 것 같아서 말이다.
▦ 법희롱 문제는 참여정부 때 본격적으로 논란이 됐다. 대통령이 밉다고 탄핵까지 해야 하느냐, 선거공약이자 국회에서 가결까지 된 수도 이전을 무산시켜야 하느냐 같은 문제다. 이를 두고 정치학자 최장집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 곧 ‘정치의 사법화’라는 개념으로 거세게 비판했다.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결론을 낸 뒤 선거로 심판받는 게 민주주의의 원칙인데, 툭하면 사법기관으로 쪼르르 달려가 수사해 달라, 재판해 달라 징징대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의 정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1970년대 미국 정치학계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정책이나 노선 수정처럼 불리함을 뒤엎기 위해 쓸 수 있는 다른 정치적 카드가 없을 때, 언론사와 사법기관을 통로로 한 ‘폭로, 수사, 기소, 재판’을 그 카드로 쓰는 사태다. 그 결과 언론사와 사법기관은 지엄한 도덕 검열관이 되고, 정치는 그저 살아남은 자들만 기쁨을 누리는 시궁창이 된다. 6ㆍ13 지방선거 이후 일련의 과정이 그렇다. 그 와중에 노회찬 의원이 몸을 던졌다. 법희롱은 도덕성 고양보다 민주주의 고갈과 가까운 것 같다.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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