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한 콘텐츠’가 2년의 준비 끝에 호수 가운데 불뚝 솟은 호박(湖泊) 마냥 튀어 올랐다. 콘텐츠는 관성적으로 ‘문화’와 함께 짝을 이룬다. 실상은 다르고, 또 아니다. 콘텐츠는 제 분야와 연애가 가능하다. 한국일보와 경북도의 합작품인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을 스토리텔링 기획자의 시각에서 해독하면 ‘액면은 경제콘텐츠요, 이면은 문화콘텐츠’다.
이 의미를 전하기 위해 2년 전 기억의 복기가 필요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 같은 편린들을 주워 모으고, 엉킨 기억의 실타래를 찬찬히 풀다 보니 단 한 사람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김남일 경북도 도민안전실장이다. 그가 없었다면, 이 ‘전준한’이란 보물 콘텐츠는 어쩌면 영원히 수면 아래 박혀 있었을지 모른다.
낚시 바늘에 걸어 ‘전준한’을 흠집 없이 들어 올린 건 오로지 그였다. 도청이 있는 안동댐에서인지, 전준한의 고향 상주의 공갈못에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낚시 실력이 웬만한 강태공 뺨친다는 게 중요하다. 무려 사회적경제의 뿌리를 통째로 길어 올렸다.
그 다음은 선수가 뛸 차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200쪽 분량의 ‘퍼스트 펭귄-전준한 이야기’를 쓰고, 나는 5개월간 폭 주저앉았다. 대단히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다. 이를 뒷받침 할 사료와 자료가 태부족했다. 있어도 몇 줄, 한 쪽에 불과했다. 그걸 버무리려다 진이 다 빠져 몸져누워버린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촌(牧村) 선생이 아리게 다가왔다. 목촌 선생이 ‘이 봐요, 심공 내가 감내했어야 할 고통이 당신 고통의 100배였소’라고 무념무상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목촌 전준한. 그는 오늘날 사회적경제의 뿌리가 되는 상주함창협동조합의 창시자다. 이를 뒷받침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민족을 처참히 짓밟았던 일제, 그들의 기록이다. 기가 막힌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일제가 ‘전준한은 조선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이것이 성공하자 조선 땅에 협동조합운동 열풍이 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고등경찰의 필독서였던 ‘고등경찰요사’가, ‘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이 공히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기록에서는 ‘독립기념관’ 아카이브(디지털 문서 보존소)에 목촌 선생의 행적을 잘 기억하고 있다.
잠자고 있던 전준한 콘텐츠가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으로 그의 사후 반세기 만에 되살아났다. 그는 엄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한 협동조합은 사회주의운동이 아니었고, 오늘날 사회적경제 역시 사회주의 경제가 아니다. 제1회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 수상자 강대성은 말한다. “사회적경제요? 한 마디로 ‘착한 기업’이죠.”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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