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피해금 보관ㆍ반환하는 지위”
통장을 보이스피싱 조직에 빌려 준 사람이 그 통장에 입금된 돈을 인출했다면, 횡령죄(다른 사람의 재물을 보관하는 사람이 그 재물을 빼돌리는 죄)로 처벌받을까? 하급심은 횡령죄가 아니라고 봤지만, 대법원은 횡령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진모(26)씨는 지난해 2월 보이스피싱 조직에 자신들 명의의 대포통장을 빌려줬으나, 약속됐던 사례금 300만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 통장에 딸린 체크카드를 몰래 하나 더 챙겨뒀다가, 같은 달 이 통장에 들어온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돈 300만원을 인출했다.
이 같은 행위에 대해 검찰은 이미 통장을 넘겨 준 진씨가 통장에 보관된 돈을 임의로 사용한 것은 보이스피싱 피해자 또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한 횡령에 해당한다고 봐 기소했다. 그러나 1ㆍ2심은 “보이스피싱 조직은 피해금에 대한 권리가 없다”며 “피고인들과 범죄 피해자 사이에도 금전 위탁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 횡령 혐의를 무죄로 봤다. 다만 통장을 빌려준 행위 자체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보아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반적으로 어떤 계좌에 계좌명의인과 송금인 사이에 법률관계가 없는 자금이 송금됐다면, 그 돈은 송금인에게 반환돼야 한다”며 "계좌 명의인이 돈을 챙길 뜻으로 인출했다면 횡령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는 명의인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됐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며 “피해자가 돈을 송금한 경우 명의인은 피해금을 보관하고 반환하는 지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남부지법 형사항소부에 돌려보냈다. 원심법원은 다시 재판을 열어 횡령죄 유죄를 반영하고 형량을 재산정해야 한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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