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 50대 팀장급 직원
올해의 딜러상 등 맹활약했지만
기업영업 별동대로 배치 뒤
거센 실적 압박 시달리다 숨져
노조 “책임자 처벌,사과해야”
사측 “깊은 애도…유족에 지원”
‘위기다. 직업에서의 위기. 그보다는 인생 위에 놓인 위기. 이런 상황에 놓이게 바란 건 아닌데 내가 싫으면 떠나면 된다. 인연에 얽매이지 않을 곳으로…’
KB국민은행에서 팀장급 직원으로 일하던 A(50)씨가 5월 26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한 권의 수첩을 남겼다. A씨가 겪었던 지난 몇 달간 일상과 고통스러웠던 내심이 담겨 있었다. 수많은 한숨과 한탄, 그 중 유난히 눈에 띄던 ‘인연에 얽매이지 않을 곳으로’라는 문구는 결국 그의 유언으로 남게 됐다.
A씨는 1994년 국민은행에 들어가 인정받는 행원으로 성장했다. 특히 외환ㆍ파생금융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주로 외환딜러로 활약했다. 2012년에는 세계적인 외환딜러 협회인 ‘포렉스클럽(Forex Club)’에서 주는 ‘올해의 외환딜러상’을 받았다. 이후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줄곧 본점 외환딜러로 근무하다, 2017년 순환근무 원칙상 광화문지점으로 옮기게 됐다. 이곳에서도 A씨는 탁월했다. 외환과 상관없는 업무를 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1년간 은행장 표창만 3차례 받았다.
승승장구하던 A씨는 신임 행장이 오면서 올 초 만들어진 ‘아웃바운드(Outbound) 사업본부’란 곳으로 배치됐다. 아웃바운드는 각 지점에서 관리하지 못하는 ‘외부감사대상 규모(직원 수 기준 300명 이상)’의 기업들을 별도로 영업해 거래처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을 뜻한다. 사업본부 아래 ‘스타팀(팀원 3명)’이라 불리는 조직 29개가 전국을 지역별로 나눠 맡아 공격적으로 영업해야 했다. 일종의 ‘기업영업 별동대’인 셈이다. A씨는 서울 종로구ㆍ중구ㆍ용산구 등을 담당하는 스타팀에 들어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야심 차게 만들어진 스타팀은 거센 실적 압박에 시달렸다. 매주 월요일이면 ‘만난 기업 수, 만난 날짜, 만난 기업 중 거래처가 된 곳’을 보고해야 했고, 실적으로 순위를 매겼다. A씨 팀은 전국에서 실적이 가장 좋지 않아 압박이 더욱 심했다. 업무도 과했다. 실적을 올려야 하면서도, 명절이면 지점 창구 지원까지 나가는 등 스타팀 고유 업무가 아닌 것까지 소화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A씨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스타팀에 온 뒤 당뇨를 얻어 몸무게 급격하게 빠져 주변 동료들이 걱정하기도 했다. 아내에게는 “팀을 옮기고 나서 너무 힘들다” “건강이 나빠져 걱정이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A씨는 서울 지역을 담당하는 상사에게 당시의 고통을 토로하는 글을 메모장에 남겼다. ‘기업금융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는 제가 이 자리에서 업체를 개발하는 것이 너무 큰 압박감입니다. 이 이을 수행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못 미친다고 판단되시면 교체해 주십시오.’ 하지만 A씨는 이 글을 끝내 상사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국민은행 노동조합은 A씨 사망 이후 지난달 1일부터 2주간 조사해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은행 측에 책임자 처벌과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책임자 처벌과 공식 사과를 거부했다”고 노조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에 대해 국민은행 측은 “(고인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라면서도 “해당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할 건 없다. 다만 허용된 범위 내에서 유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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