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멀리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 여행가방을 열었더니, 갑자기 하루살이 떼가 뿌옇게 날아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기이한 생각이 들어 가방을 열어 샅샅이 뒤져 보니 언제 넣었는지 알 수 없는 귤 하나가 짓눌려 터져 있었다. 오, 바로 너였구나!
여행을 다녀오며 미처 꺼내 먹지 못한 귤이 터져 그런 일이 생겼던 것. 부패하면 할수록 달콤해지는 시간 속에서 알을 까고 나와, 날개가 자라고, 캄캄 옥(獄)에 갇혔다가 드디어 대명천지로 뿌옇게 날아 나온 하루살이들. 가방 밖으로 뿌옇게 날아오르는 하루살이들은 외딴 섬에 있는 감옥에서 도망치는 탈옥자들만 같았다.
터진 귤을 꺼내 버리고 여행가방을 들여다보며 혼자 낄낄거리고 웃었다. 밀봉된 생명의 산실, 잔인한 시간의 옥(獄)을 나는 그렇게 끙끙 짊어지고 다녔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짊어지고 다니는 동안 숱한 생명들을 꽃피우다니···.
오늘 내가 하루살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도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아닌 새털처럼 많은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누구나 신산고초의 순간들이 있지 않던가. 어떤 이는 자기 앞에 닥친 소태껍질을 씹는 것 같은 삶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장탄식을 늘어놓기도 한다.
왜 이렇게 내 인생은 자꾸 꼬이기만 하는 거지? 마치 등나무 줄기에 챙챙 휘어 감긴 칡덩굴처럼!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런 형편을 ‘갈등’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갈’은 칡 갈(葛)자를 쓰고, ‘등’은 등나무 등(藤)자를 쓴다. 등나무 줄기에 칡덩굴이 챙챙 감겼는데 풀리겠는가. 애면글면해 봐야 풀리지 않는다.
이처럼 풀리지 않는 생의 난관 앞에서 탄식하며 깊은 한숨을 토하는 당신을 위해 나는 가방 속에 있던 하루살이들이 훨훨 날아오르던 장면을 보여 주고 싶었다. 캄캄한 시간의 감옥 속에서도 자기 생을 활짝 꽃피운 그 모질고 억척스런 생명을.
며칠 전 인생의 고락을 아는 사람이 다듬어 낸 잠언인 ‘채근담’을 꺼내 다시 읽었다. 그날따라 이런 잠언이 가슴에 뭉클 와 닿았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부대끼며 이루어진 복이라야 그 복이 비로소 오래간다.” 복 받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생의 열락만 가득한 상태를 ‘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을 깊이 통찰한 현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부대끼며 이루어진 복이라야 그 복이 오래간다고 일러 준다.
우리 마음은 거의 두 갈래로 나뉜다. 바깥의 복을 추구하기와 내적인 복을 추구하기. 채근담을 쓴 현자가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부대끼며 이루어진 복’을 말할 때, 그는 내적인 복을 더 추구하는 자가 아닐까. 티베트어로 불자(佛子)를 ‘낭파(nangpa)’라 하는데,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자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소갈 린포체, ‘깨달음 뒤의 깨달음’)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열락만 바라는 바깥의 복이 아니라 즐거움과 괴로움을 다 품어 안는 내적인 복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나는 최근에 낡은 한옥 기둥에 한글로 된 주련(柱聯)을 달았다. 일곱 개의 기둥마다 주련을 달았는데, 한 기둥에는 ‘불편도 불행도 즐기며 살자!’란 주련을 달았다. 편리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불편을 견디지 못해하고, 더구나 불행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한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불편은 힘겹고 불행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안다. 피하고 싶다고 불편과 불행이 비껴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불편도 불행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게 아닐까.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불편도 불행도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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