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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 번역가 숨겨라… 이상한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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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 번역가 숨겨라… 이상한 숨바꼭질

입력
2018.07.17 04:40
수정
2018.07.17 09:48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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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 ‘어벤져스3’ 오역 논란 이후 

 배급사, 번역가 꽁꽁 숨기기 나서 

 오역 책임 피하려 비공개 의구심 

 “정체불명 창작물 산 찜찜한 기분” 

 靑 게시판에 실명공개 청원 등장 

 편당 번역료 평균 200만원 불과 

 열악한 환경 개선ㆍ역번역 검증을 


이미도, 김은주, 조상구. 1990~2000년대 외국 영화 번역하면 떠오르는 이름이다. 영화가 끝나면 큼지막한 이름이 검은색 스크린에 돋을새김 됐다. 엔딩 크레디트에 번역가의 이름이 감독보다 먼저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번역가의 위세는 당시 기세등등했다.

가로 자막 한 줄에 넣을 수 있는 글자 수는 최대 12자다. 의역으로 한국말 맛을 더하며 대사의 의미를 전하니 번역가는 가히 ‘12자의 마술사’다. 번역가를 스타처럼 내세우기까지 하던 시절은 이제 옛말이다. 할리우드 직배사와 국내 대형 배급사들은 요즘 오히려 블록버스터 영화 ‘번역가 숨기기’에 나섰다. 지난 4월 개봉해 1,1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마블의 슈퍼 히어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어벤져스3’)의 오역 논란 후 극장가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번역가 감춘 ‘앤트맨2’ ‘인크레더블2’ ‘미션임파서블6’ 

이달 줄줄이 개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번역가를 노출하지 않는다. ‘앤트맨과 와스프’(‘앤트맨2’ㆍ4일 개봉)를 비롯해 ‘인크레더블2’(18일 개봉),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미션 임파서블6’ㆍ25일 개봉)은 모두 영화 끝자락 화면에 번역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수입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는 3년 전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선 번역가 이름(치킨런)을 엔딩 크레디트에 올렸지만, 이번엔 공개하지 않기로 방침을 바꿨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16일 “최근 번역이 민감한 사안이 되다 보니 번역가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어벤져스3’ 오역 논란을 계기로 박지훈 번역가의 번역 작품 보이콧 움직임까지 이는 등 외화 오역에 대한 관객들의 반감이 커지면서 영화 배급사들도 잔뜩 움츠러든 모양새다. 마블(‘앤트맨2’)과 픽사(‘인크레더블2’)의 작품을 수입배급하는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가 번역가 노출을 특히 꺼리고 있다.

 “번역가 숨기는 건 알 권리 침해” 실명제 청원까지 

외화 배급사의 번역가 감추기는 관객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다. 돈을 내고 영화를 봤는데 정작 누가 번역을 했는지 알 수 없어 정체불명의 창작물을 산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외화 번역가 실명 공개 규정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들어 주세요’란 청원까지 올라왔다. 배급사가 일방적으로 번역가를 숨기는 건 소비자 알 권리 침해하라는 게 요지였다. 지난 7일 서울 상암동 한 멀티플렉스에서 ‘앤트맨2’를 보고 나온 박건민(43)씨는 “번역가만 공개하지 않는 건 마치 식당에서 김치를 파는데 배추 원산지만 밝히고 고춧가루 원산지는 밝히지 않는 꼴”이라며 “번역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밖에 보이지 않아 불쾌하다”고 비판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으로 여겨진다. 조명 담당 등 창작에 관여한 모든 스태프가 맡은 일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엔딩 크레디트에 제 이름을 올린다. 논란이 두렵다 해도 번역가 숨기기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번역가와 영화 배급사가 오역에 대한 책임 회피를 위해 번역가를 노출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는 이유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관계자는 번역가 비공개 이유를 “회사 방침”이라고만 밝혔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와 달리 국내 중소 외화 배급사들은 번역가 공개를 꺼리지 않는다. 한 외국 영화 수입사 대표는 “번역은 엄연히 창작의 영역”이라며 “번역가 공개는 반드시 한다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번역가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번역을 중요시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라며 “제대로 영화를 즐기고 싶은 관객을 위한 양질의 번역을 위해서라도 ‘번역가 실명제’는 이뤄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관객 수준 따라가지 못한 번역… ‘역번역 검증’ 필요 

‘번역가 실명제’ 주장은 관객의 외화 번역에 대한 불신과 무관치 않다. 외국어뿐 아니라 해외 문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나라 밖 문화 콘텐츠에 대한 지식도 자연스레 늘었다. 관객의 높아진 눈높이를 국내 번역 수준이 따라주지 못하는 게 문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번역 검수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혜원 공연평론가는 “외국 유명 공연 제작사처럼 ‘백-트랜슬레이션(Back Translation)’ 즉 역번역 검증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캣츠’ 등의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 유명 공연기획사 RUG는 해외 공연 때 현지어 번역을 다시 영어로 옮겨서 오리지널 콘텐츠의 맥락에서 번역된 대사가 벗어나지 않았는지를 살핀다.

 편당 200만원… 열악한 번역 현실 

번역의 질을 올리기 위한 환경 개선도 필요하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경우 평균 번역 자막 수는 약 1,800개다. 작업 시간은 약 1주일이 주어진다. 10년 넘게 영화 번역을 한 A씨는 “큰 (할리우드) 스튜디오 작품의 경우 5번까지 대본이 바뀌기도 해 번역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새 대본이 올 때마다 작업을 새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중요한 작품일수록 영상이 일그러진 채 와 번역에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영화 편당 번역료는 평균 200만원. 한 작품(대극장 공연 기준) 번역료가 700~1,000만원인 공연계의 3분의 1도 안 된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번역가가 퇴고 등을 거쳐 제대로 된 번역을 하려면 최소 3주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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