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모유만큼 건강한 음식은 없다.”
40여년간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한 ‘모유 수유 권장’ 결의안이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총회 안건으로 올라왔다. ‘모유 대체 식품의 영양소가 더 낫다’는 관련 업계의 부정확한 광고를 각국 정부가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194개국 대표단의 지원 아래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보였던 이 결의안은, 그러나 미국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미국이 저개발국을 상대로 무역 제재나 군사 지원 축소 등을 거론하며 압박까지 한 것으로 알려지자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공분이 일고 있다.
8일(현지시간) 5월 세계보건총회에 참석한 외교관들을 인용한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은 이 결의안 초안에서 ▦각국 정부에 ‘모유 수유를 보호ㆍ권장ㆍ지원하라’고 요구하는 항목과 ▦아동에게 해로운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식품 홍보를 제한하라는 항목을 삭제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통하지 않자 급기야 해당 결의안을 제출할 예정이었던 남미 에콰도르에 무역 제재와 핵심 군사 지원 취소 등을 거론하며 제출을 포기하라고 압박했고, 에콰도르는 이에 굴복했다.
졸지에 후원국을 잃어버린 보건 운동가들이 다른 나라를 급히 찾아 나섰지만, 아프리카와 중남미 저개발 국가들 역시 미국의 압력을 우려해 이를 회피했다. 회의 현장에 있었던 영국 모유수유 운동단체 ‘베이비밀크액션’의 패티 런덜 정책국장은 “미국이 영유아 건강을 지키기 위한 40년간의 합의를 뒤집어엎으려고 세계를 볼모로 삼은 격이었다”라며 “우리는 경악했고 슬픔에 잠겼다”고 말했다.
결국 미국 눈치를 가장 덜 보는 러시아가 결의안을 제출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러시아는 미국 입장을 반영해 일부 문구를 수정했지만, 대체로 당초 원안과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사실상 미국 로비가 ‘찻잔 속 태풍’에 그친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 대표단 일원은 “영웅이 되려는 게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에서 대국이 소국을 멋대로 휘두르는 것은 옳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는 관련한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 결의안의 수정을 적극 추진해 온 미국 보건복지부의 한 관료는 “모유를 수유할 수 없는 여성들이 대안 수단을 찾을 수 있어야 하며 이런 행위에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보건 운동가들은 국제 분유업계가 미국을 통해 로비를 시도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
분유업계는 최근 선진국 시장에서 모유 수유가 늘어나면서 판매량이 위축됐지만, 저개발국에서는 여전히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는 2018년에도 4%가량의 매출 증가를 예상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과 세이브더칠드런재단에 따르면 이들 가난한 국가는 분유업계의 로비가 가장 강경하게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영유아의 건강 향상을 목표로 미국에 설립된 국제 비정부기구 ‘사우전드 데이스’의 루시 설리번 대표는 “미국의 개입은 공공보건 대 사적 이익의 구도가 드러난 것”이라며 “모유 수유는 여성과 아동의 생명을 지키지만 조제분유와 낙농업계에는 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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