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초일류급보다 월등한 AI 등장 이후…강한 상대에게 위축됐던 심리도 변화
인공지능(AI) 광풍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AI는 일대 변혁을 가져오고 있다. 바둑계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016년 3월 구글 AI인 알파고는 예상을 뒤엎고 세계 최정상 이세돌(35) 9단에게 4승1패로 완승하면서 바둑계에 충격을 던졌다.
AI는 바둑계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최근 프로바둑 기사들 사이에선 AI 프로그램 구현이 가능한 고사양 컴퓨터(PC)나 그래픽 카드 구입 열풍이 불고 있다. 국가대표팀 코치이자 바둑TV의 ‘2018 KB바둑리그’ 해설위원인 홍민표(34) 9단은 “요즘 정상급 기사들 사이에서 AI 프로그램 공부는 기본”이라며 “오랫동안 굳어졌던 정석 수순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인 부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AI는 프로바둑 대국장의 모습까지 바꿔 놓고 있다. 우선 프로바둑 기사들은 대국 때 스마트폰 소지가 금지됐다. 대국 도중, 화장실 등을 다녀오면서 스마트폰으로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96년 시작된 LG배 조선일보 기왕전(각자 제한시간 3시간, 40초 초읽기 5회ㆍ우승상금 3억원)은 올해 통합예선부터 대국 사이에 포함됐던 점심시간을 없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이번 LG배 통합예선부터는 스마트폰을 포함해 전자기기의 악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점심시간 없이 진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AI의 등장으로 상대적 승부 성격이 강한 바둑에서 기사들의 심리적인 부분이 바뀌고 있다. 1대1 맞대결로 펼쳐지는 바둑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경우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AI 등장은 이런 실전에서의 심리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홍 9단은 “세계대회 우승 경력의 초일류급 기사와 대국을 벌이면 상대방의 위세에 눌리는 경향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며 “초일류급 기사 보다 월등한 AI가 나온 이후, 젊은 기사들 사이에선 이런 모습들이 줄어드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올해 KB바둑리그에 첫 출전해 이세돌 9단과 김지석(29) 9단, 설현준(19) 4단 등 쟁쟁한 상대를 차례로 꺾으며 3전 전승을 기록 중인 박하민(20) 3단이 이런 유형이다. 이 9단과 김 9단은 세계 대회 우승 타이틀을 보유한 초일류급 기사이고 중국 바둑계에서 가장 주목할 선수로 꼽은 설 4단 또한 최근 중국 을조리그에서 7승1패로 맹활약한 강자다. AI 연구에 빠졌다고 밝힌 박 3단은 “사람과는 누구나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최근 상승세의 배경을 전했다. 올해 24승8패를 기록 중인 박 3단은 현재 승률 8위를 달리고 있다.
AI는 프로바둑 기사들의 연구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또 다른 ‘2018 KB바둑리그’ 해설위원인 이희성(36) 9단은 “오랫동안 바둑 기사들 사이에선 삼삼오오 모여서 최적의 수순을 찾는 연구회가 있었는데, AI 등장으로 여러 명이 한 곳에서 공부해 온 이런 연구회 형태도 바뀔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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