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위원장 못찾고 숱한 사람 욕보여
의원 112명 전원 '거세된 침묵' 책임
보수매니페스트 제시, 사즉생 각오를
한 후배가 SNS에 "기사를 보다가 입안에 있던 걸 다 뿜을 뻔했다"는 글을 올렸다. 사연을 보다가 필자도 뿜을 뻔했다. 자유한국당이 당 재건과 혁신을 이끌 비상대책위원장 후보 리스트에 이회창 전 총리도 올려놓았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고 무한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했다. 모였다 하면 비박-친박, 복당-잔류파들이 네탓 타령하며 삿대질하는 집단이니, 그런 신선놀음 끝에 나온 장난이려니 했다.
그런데 비상대책위 준비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라디오에 나와 "이 전 총리 측에서 의사가 없다고 연락이 왔으니 더 이상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며 인심 쓰듯 후보군에서 제외하겠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아니면 말고' 혹은 '못먹는 감 찔러나 보는' 수법이다. 이런 식의 마구잡이 하마평에 올라 망신살이 뻗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런데도 "노출 안된 분이 30여명 더 있다"고 떠벌리며 국민공모를 통해 추천도 받는다고 한다. 이게 6ㆍ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한국당이 사퇴ㆍ해체ㆍ해산 등 입에 발린 온갖 말을 쏟아내며 한달 가까이 해온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위원장이 아니라 결코 기득권을 놓지않는 112명의 소속 의원들이다. 이른바 '참패 5대 공신록'의 끄트머리에 '거세된 정치를 해온 현역의원 전원'으로 이름을 올린 그들 말이다. 보수정부에서 단물만 빨아먹으며 갑질을 일삼다 대통령 탄핵 이후 각자도생만이 살 길이라며 모래에 머리를 파묻은 채 공부도 투쟁도 모두 팽개친 그들이다. 문득 지난 달 한국당을 떠난 홍준표 전 대표가 쏟아낸 '마지막 막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고 청산대상으로 고관대작 알바, 사생활 난봉꾼, 세계일주 마니아, 술주정뱅이, 카멜레온, 사이코패스, 사이비 중립파, 해바라기, 친박 앞장이 등 9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범주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드니 결국 먹던 우물에 침뱉은 셈이다.
이 범주와 관문을 통과했다고 안심할 수 없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지목한 한국당의 7가지 죄목이 또 기다린다. 새 인물을 키우지 못한 죄, 권력의 사유화에 침묵한 죄, 계파이익을 국민이익보다 앞세운 죄, 대여 투쟁도 대안 제시도 못한 죄, 막말과 저질행동으로 국민을 짜증나게 한 죄, 반성도 책임도 팽개친 죄, 희망과 비전을 도외시한 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죄목은 침묵과 태만이다. 중진이든 소장파든 어느 누구도, 왜 정치를 하는지, 고객은 누구이며 그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 감동을 주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은 죄다. 특권과 자리 보전에만 급급해 해바라기처럼 몰려다녔을 뿐 그 흔한 쇄신의 깃발 하나 들지 못하고 쓴소리 곁에도 가지 않은 죄다. 이런 진단과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하는 각오 없이 백방으로 명의를 수소문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사실 지금쯤이면 한국당에서 불출마나 탈당선언이 쏟아져나와야 마땅하다. 그런데 되레 흉하고 뻔뻔한 얼굴들이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공천권에 집착하는 작당을 일삼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불평등 해소로 장사하는 진보정권의 폭주를 막기 위해 보수야당이 어떤 가치와 전략으로 대항하고 대안을 만들겠다는 '보수 매니페스토'가 나와야 할 시간과 자리에 서로 물고뜯는 소음만 넘친다. 비대위원장 리스트에 오른 인사 대부분이 모욕감을 느끼며 "장례식 치를 일 있냐"고 손사래를 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답은 '그라운드 제로'로 내려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두렵고 불안해도 부닥쳐야 한다. 문학작품엔 종종 주제와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제사(題詞)를 글머리에 쓰는 경우가 많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좁은 문 비유와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다. 문학적으로는 구원과 희망을 암시하는 것이겠으나 지금 한국당 의원들에게 비수처럼 꽂혀야할 말이다. 그래야 구원투수도 입맛이 돋는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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