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8년(세종 30년) 8월 세종대왕은 전국에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영을 내린다. 병선의 주요 재목이므로 군사요충지 주변에서는 함부로 벌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함께 두만강의 녹둔도(鹿屯島)를 군사요충지 중의 하나로 꼽았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녹둔도가 언급된 최초 기록이다. 이후 녹둔도는 총 18건 실록에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1587년(선조 20년) 여진족의 침입으로 당시 이 섬의 둔전을 지키던 이순신 장군이 패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실록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듬해 이순신 장군은 조선군이 벌인 복수전에 백의종군 신분으로 참가해 큰 공을 세워 사면ㆍ복직된다.
431년전 우리 선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녹둔도는 이제 그 지리적 상황과 우리와의 관계도 많이 변했다. 두만강 중간의 비옥한 퇴적지였던 23㎢ 면적의 이 섬은 느린 유속으로 쌓인 토사 때문에 러시아 연해주에 붙어버린 삼각주가 되었다. 더욱 큰 변화는 러시아의 실효지배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녹둔도 지역이 러시아 지배상태에 들어간 사연은 조선과 청나라의 영유권 분쟁과 관계가 깊다. 세종시절 편입된 이후 조선이 단 한번도 영토주권을 포기한 적 없지만, 녹둔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던 청나라는 1860년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맺게 된다.
아편전쟁에 패배한 뒤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베이징조약을 통해 영토주권을 침탈 당했는데 그 중 하나가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기는 내용이었다. 불행히도 베이징조약에 언급된 연해주에는 녹둔도도 포함됐고 러시아는 이를 근거로 이후 이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의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녹둔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주장도 거듭 확인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하고 있다. 대표 사례는 1990년 북한이 구 소련과 새로운 국경협정을 맺은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당시 협약에서 두만강 중간을 두 나라 사이의 경계로 확정했다. 녹둔도가 토사퇴적으로 연해주와 붙은 만큼, 북ㆍ러 국경을 두만강 중간으로 인정하는 순간 녹둔도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 협정이 알려진 직후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는 반발했다. 협정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한국 영토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남북관계 개선과 러시아와의 협력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문재인 정부는 냉전시대 보여줬던 공세적 태도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외교부는 녹둔도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묻는 질문에 “녹둔도와 관련해서는 더 정확한 고증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전문가의 연구를 토대로, 지리적ㆍ역사적 측면 등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검토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영토주권이라는 명분과 원만한 외교라는 실리 사이에서 녹둔도 문제가 ‘조용한 영토갈등’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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